바쁜 뉴욕의 아침, 한 청년이 지상 400m 외줄에 위태롭게 서 있다. 안전 로프도 그물도 없이 긴 봉 하나를 들고 줄 위에 선 그는 경악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1시간 가까이 줄 위에서 걷고, 뛰고, 춤춘다. 1974년, 지금은 사라진 세계무역센터 쌍둥이빌딩 110층 사이를 걸었던 프랑스 청년 필리페 프티의 실제 이야기다.

칼럼 매캔의 〈거대한 지구를 돌려라〉는 그 마법 같은 순간을 소실점으로, 슬픔과 두려움에 짓눌려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정교하게 엮어낸다. 문학이 상처를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작가는 개개인의 슬픔을 서정적인 문장으로 옮기며, 아득한 인연으로 엮인 ‘우리’의 체험으로 확장해간다.

“하느님은 내 조각난 가슴을 다시 하나로 붙여줄 생각이 없다. (…) 나는 그다지 많은 죄책감 없이 하느님을 포기했다.”

ⓒAP Photo<거대한 지구를 돌려라>는 1974년 세계무역센터를 외줄타기로 횡단했던 필리페 프티를 다룬 소설이다.
슬픔으로 낯선 이들과의 인연을 확인하다

성공과 부, 빈곤과 갈등이 공존하는 도시 뉴욕.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더 이상 빛에 대해 말하지 않는 창녀 모녀, 전쟁으로 아들을 잃은 어머니, 동생을 잃고 희망을 내려놓은 형, 조직 앞에 힘없이 무릎 꿇어야 하는 판사…. 그들에게 지상 400m 외줄에 서 있는 청년은 상처에 얽매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또 다른 자신이다. 또한 전쟁에서 잃은 아들이고, 팔과 팔을 맞대고 선 또 다른 ‘나’이다. 모두의 시선이 모이고, 위태롭게 서 있던 청년이 걸음을 떼고, 사람들은 슬픔으로 얽힌 낯선 이들과의 인연을 확인한다. 슬픔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있다는 것, 그 사실이 상처에 얽매여 있던 사람들을 자유롭게 한다.

슬픔의 감각은 같지 않다. 벼락을 맞은 듯한, 사람을 무너지게 하는 슬픔도 다른 사람에게는 그저 ‘힘내’라는 말로 넘기는 일이 되기도 한다. 전해질 수 없는 슬픔의 감각은 흐르지 못하고 안으로 파고들어 절망이 된다. 타인의 슬픔을 온전히 느끼기에 우리는 너무 모르고, 연약하고 두려움 많은 존재다.

그런데 모든 것이 멈추고 선명해지는 순간이 있다. 먼지처럼 떠돌던 두려움과 만나는 순간들이다. 이 순간 앞에 서면 사람들은 밑바닥에서 치고 올라오는 온건한 슬픔을 느끼고, 아득한 인연들을 떠올리게 된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해야 할 일을 알게 되곤 한다.

“우리는 휘청거리며 나아간다… 침묵으로 작은 소음을 들이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우리 자신의 행동을 발견한다. 그것으로 거의 충분하다.”

인사 한번 나눈 적 없던 세월호 희생자들의 분향소를 찾아, 기꺼이 슬픔의 감각을 새겨넣는 행렬을 보며 안도를 느낀다. 타인의 슬픔 앞에 시간을 멈추고 사방에 떠다니는 두려움 조각들과 만나는 바로 그 순간, 슬픔의 소통을 가로막고 있던 벽이 허물어져 내릴 것이다.

슬픔이 슬픔을 만나면 위로가 되는 법, 그러니 상처받은 우리를 이어주는 것도 기쁨보다는 슬픔일 것이다. 절망의 시간이 지나고 덩그러니 남겨질 이들의 설운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것은 분노도 포근한 위로의 말도 아니라, 이 기꺼운 슬픔의 소통일 것이다.

기자명 박정남 (교보문고 전략구매팀 과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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