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러미 벤담의 파놉티콘(원형감옥)이나 조지 오웰의 〈1984〉에서는 국가나 권력이 감시의 주체다. 원근법적으로 설계된 파놉티콘의 한가운데나 꼭대기에 빅브라더가 눈을 부라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그문트 바우만과 데이비드 라이언의 대담집 〈친애하는 빅브라더〉와 한병철의〈투명사회〉(문학과지성사)는 지구화와 디지털 데이터베이스가 맞물려 완성되어가는 오늘날, 고전적인 파놉티콘 모형으로는 더 이상 현재의 감시사회를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벤담은 행동교정을 목표로 하는 파놉티콘이 실효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유도하고 유혹하는 차원은 핵심적인 게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파놉티콘 도구 상자에는 채찍만 있을 뿐 당근은 없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시장에서 전개되는 감시는 선택의 요소를 교묘하게 처리(강제가 아닌 유혹을 통해)합니다. 현대 사회는 계획된 제안이 강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 제안을 자발적으로 요구하는 과정에서 통과시키도록 만드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가정하고 있습니다.”(〈친애하는 빅브라더〉)
 

ⓒ이지영 그림

“오늘날 세계 전체가 하나의 파놉티콘으로 발전한다. 파놉티콘의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의 공간을 자처하는 구글과 소셜 네트워크는 파놉티콘적 형태를 취해간다. 오늘날 감시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에 대한 공격’이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 스스로 자발적으로 파놉티콘적 시선에 자기를 내맡긴다. 사람들은 자기를 노출하고 전시함으로써 열렬히 디지털 파놉티콘 건설에 동참한다. 자유는 곧 통제가 된다.”(〈투명사회〉)

지구화된 디지털 데이터베이스에 소속된 우리는 온라인 공간에 들어갈 때, 해외여행을 위해 여권을 만들 때, 국가 보조금을 신청할 때, 각종 신용카드나 적립 카드를 획득하고자 할 때 개인정보를 제공하면서 자진해 디지털 파놉티콘 체제의 주민이 된다. 물론 여기에는 우리의 선택지가 없기 때문에 신용카드 3사의 개인정보 유출 사태 앞에서 “정보를 제공하는 단계에서 신중해야 한다. 우리가 다 정보 제공에 동의해준 것이 아니냐”라던 현오석 부총리의 반문이 뻔뻔스럽게 여겨지는 경우가 더 많지만, 할인 상품이나 적립 카드처럼 순순히 정보를 주는 편이 이득일 것이라는 생각에서 동의를 하는 경우도 많다. 기업이 이렇게 얻어낸 정보는 데이터 마이닝(data mining)을 거쳐 맞춤형 마케팅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바우만은 소비자가 기업에게 정보와 지갑을 동시에 털리는 자발적 복종에 ‘DIY식 직무’라는 얄궂은 이름을 붙였다.

디지털 파놉티콘 체계를 완성하는 것은 강제나 강요가 아니라 사적인 이익과 즐거움에서 출발한 자발적인 참여다. 예컨대 자기만족을 위해 이용한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관계망 서비스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감시’로 바꾸어놓는다. 로빈 터지의 〈감시 사회, 안전장치인가, 통제 도구인가?〉(이후)는 빅브라더를 통해 이득을 보는 사람은 극소수지만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빅브라더 흉내를 낸다고 꼬집으면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는 청소년들에게 했다는 충고를 인용해놓았다. “지

〈친애하는 빅브라더〉지그문트 바우만·데이비드 라이언 지음 한길석 옮김 오월의봄 펴냄

금은 유튜브 세상입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능하지요. 하지만 한번 유튜브에 올라간 글이나 영상은 두고두고 여러분의 발목을 잡을 것입니다. 젊을수록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기 마련이고 실수도 많이 하기 마련이니 글을 올릴 때는 한 번 더 생각하고 올리세요.”

세계 최강국이자 자유의 나라라는 미국 대통령이 청소년에게 들려주는 교훈이라기에는 좀스럽다는 느낌도 든다. 그러나 2009년 9월, 한국에서 일어난 박재범 사건은 오바마의 충고가 매우 실제적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스물두 살 난 한국계 미국인 가수 박재범은 남성 그룹 2PM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중, 연습생이던 열여덟 살 때 미국의 웹사이트 마이스페이스에 한국을 비하하는 내용을 올렸던 게 밝혀지면서 가수 생활을 잠시 접어야 했다.

“두고두고 발목 잡을 유튜브 세상”

로빈 터지는 박재범의 예를 몰랐지만, 그의 책에는 국적이나 연령을 불문하고 인터넷과 사회관계망 서비스에 악의 없이 올린 짤막한 글이나 사진 때문에 영원히 잊히지 않고 조롱거리가 되거나 불이익을 받는 예가 무수하다. 캐나다의 IBM 지사에서 근무했던 나탈리 블랑샤르는 우울증 때문에 장기간 병가를 냈으나, 그녀의 페이스북을 뒤져 행복하게 웃는 사진을 찾아낸 보험사가 근무에 지장이 없다면서 보험 급여를 중단했다.

‘아랍의 봄’이나 각국에서 벌어진 점거운동(Occupy Movement) 사례가 보여주듯이 최신 디지털 기술이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연대를 결속해줄 것이라고 믿는 예찬자도 생겨났다. 〈친애하는 빅브라더〉와 〈투명사회〉의 지은이들은 그런 희망적 사고를 거부한다. 바우만은 인터넷이나 사회관계망 서비스를 통해 우리가 얻은 것은 네트워크이지 ‘공동체’가 아니라고 말한다. 공동체가 복종해야 할 규범을 갖고 있으면서 어려울 때도 곤경을 함께 나누는 친구로 이루어져 있다면, 하루 만에 수천 명을 친구로 만들 수도 있는 페이스북의 친구는 당신의 일상을 구경하면서 관음증을 즐기는 부류다.

최초의 디지털 정당인 독일의 해적당을 반(反)정당이라고 비판하는 한병철의 생각도 그와 다르지 않다. 엄격한 이론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유연한 의견과 데이터를 이데올로기로 삼는 해적당은 기존 사회경제적인 관계는 그대로 둔 채 “그저 다양한 사회적 욕구를 관리하는 역할”에 만족한다. 신기하게도 이런 분석은 6·15 남북공동선언과 10·4 남북정상선언 등을 정강·정책에서 빼자는 새정치 ‘야합’ 연합에 딱 들어맞는다.

SBS 텔레비전의 〈짝〉은 녹화 중에 출연자가 자살을 하는 불상사로 막을 내렸다. 이 시대의 취향인 리얼리티 쇼는 디지털 파놉티콘의 수감자가 피해자이며 가해자일 뿐 아니라, 자기 착취에 나선 ‘나르시시즘적 주체’라는 한병철의 말을 수긍하게 해준다. 이제 파놉티콘에 좌정한 채 눈을 부릅뜬 빅브라더는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바우만과 대담을 했던 데이비드 라이언의 〈9월11일 이후의 감시〉(울력)는 9·11 이전의 감시가 국민 국가 단위로 이루어진 자기 국민 훈육이었다면, 9·11 이후의 감시는 자국민에게 공포와 의심을 부추기면서 안전을 명목으로 외국인을 혐오하거나 특정 인종을 배제(racial profiling)한다고 주장한다. 파놉티콘은 해체되지 않고 지구의 크기로 커졌으며,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안보 산업과 첨단 기술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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