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공개하는 건 내 오덕 인생에 가장 내밀한 기록입니다.”

이영준 강사(계원예술대 교수)의 한마디에 수강생 20여 명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진다. 지난 10월25일, 서울 사직동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열린 ‘오덕인문학’ 강좌 첫 번째 시간이다. 오덕은 일본어 오타쿠(특정 장르나 작품에 빠진 이들을 일컫는 말)를 한국식 발음으로 옮긴 것. 준전문가 수준으로 특정 대상을 파고드는 이들 오덕이 왜 등장한 것인지, 이들의 ‘잉여질’은 과연 무가치한 것인지, 인문학적으로 풀어보자는 강좌의 시작을 국내 유일의 기계 비평가이자 ‘기계 오덕’을 자처하는 이영준 교수가 연 것이다. 

ⓒ시사IN 신선영‘오덕인문학’의 첫 번째 강사로 나선 이영준 교수가 ‘기계 오덕’의 세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날 그가 공개한 비장의 기록은 바로 초등학교 1학년 때 그린 기차 그림. “보통 이 나이 때는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대상을 크게 그리는 게 특징이죠. 그런데 제 그림을 보세요. 기차 크기나 문양이 철저하게 객관적이잖아요?” 어찌 보면 엉뚱한 강사의 자화자찬에 여기저기 터져나오는 웃음소리. 이렇게 유대감을 형성한 강사와 청중은 두 시간여 동안 증기기관차에서 KTX, 비행기 제트엔진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기계 오덕’의 세계를 누볐다.

그로부터 3주 뒤인 11월19일, 이번에는 같은 장소에서 ‘〈안나 카레니나〉로 본 2013 연애 풍속도’라는 강좌가 열렸다. 강사는 문학평론가 정여울씨. “요즘은 사랑에 대한 성찰은 사라지고 연애, 더 엄밀하게는 연애의 기술에만 점점 더 관심을 쏟는 것 같아요. 연애 담론은 넘쳐나는데 사랑의 깊이는 얕아지는 기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거죠.” 인기 예능 프로그램인 〈짝〉이며 〈마녀사냥〉을 끌어들이며 오늘날 사랑·연애·결혼의 삼각관계가 어떻게 뒤틀렸는지 일갈하는 정씨의 강의에 수강생들이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이번 강좌명은 ‘연애인(in)문학’. 말 그대로 연애에 인문학적으로 접근하는 강좌다. 오덕인문학 강의와 다른 점이 있다면 수강생 절대다수가 여성이라는 정도?

“삶과 괴리된 인문학은 이제 그만!”

오덕인문학과 연애인문학은 지난 8월 창립총회를 치른 인문학협동조합이 첫 사업으로 기획한 대중 강좌다. 사실 신기하다면 신기한 일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 세대에게 오덕이나 연애 현상은 일상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를 인문학적으로 들여다보려는 시도는 극히 드물었다. “인문학 강좌의 하위 주제로 연애를 다뤄본 일은 있다. 그렇지만 연애를 전면에 내세운 인문학 강좌는 처음 해보는 것 같다”라고 정여울씨는 말했다. ‘삶과 괴리된 인문학은 이제 그만!’ 이는 인문학협동조합이 태동한 근본 배경이기도 하다.

ⓒ인문학협동조합 제공지난 8월 창립한 인문학협동조합의 조합원 수는 60여 명. 대다수가 석·박사 과정에 있는 젊은 연구자들이다.

그렇다면 기존 인문학계에는 이런 문제의식이 없었을까? 그건 아니다. 일부 대학은 이런 반성에 기초해 학부생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강좌를 대폭 강화하기도 했다. 대학 밖에서도 인문학 공부 모임은 다양하게 분화하는 중이다. 수유너머, 다중지성의 정원, 데모스, 파이데이아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인문학협동조합은 대학이나 교수 그룹, 또는 특정 학문 분파가 아니라 20~30대 젊은 인문학 연구자들이 중심이 되어 이런 현실을 타개하려 나섰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창립 석 달째를 맞은 10월 말 현재, 인문학협동조합 조합원은 모두 60여 명. “대부분이 대학 석·박사 과정, 또는 박사후 과정에 있는 젊은 인문학 연구자들”이라고 홍덕구 이사(동국대 박사과정)는 말했다. 굳이 ‘인문학의 위기’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들의 현재는 팍팍하다. 인문학협동조합이 만들어지는 데 후원자 구실을 한 한만수 동국대 교수(문예창작학부)는 “연구자들이 사실상 논문 쓰는 기계로 내몰리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가 있는 대학의 경우 박사학위를 받은 뒤 정교수가 되기까지는 7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해야 한다. 한 해 평균 논문 3~5편을 써야 한다는 얘기다. “이는 사실상 제정신인 인문학자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파서도 안 되고, 심사숙고를 해서는 더더욱 안 되는 셈이다”라고 한 교수는 말했다. 그런데도 두뇌한국(BK)·인문한국(HK) 사업 따위 정부 예산에 기댈 수밖에 없는 기초학문 여건상 연구자들이 이런 성과주의 경쟁에 내몰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경쟁을 가장 밑바닥에서 떠받치는 것이 20~30대 연구자 그룹이다.

인문학협동조합이 기획한 강좌의 포스터.
그렇다고 이들의 미래가 보장돼 있나? 그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등록금은 계속 오르고, 전임교수가 될 길은 바늘구멍이며, 심지어는 강의 자리 얻기조차 힘겨워지는 상황’이다. 지난해에는 이른바 강사법(고등교육법 개정안)까지 입법 예고됐다. 주당 강의시간이 9시간 이상인 전업 시간강사를 교원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내용이 골자인데, 실제로는 이 법이 비정규 시간강사들의 대량 해고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우려였다. “강사법 개정 움직임이 협동조합을 만드는 데 직접적인 계기가 됐던 것 같다. 가뜩이나 앞날이 불투명한데, 지금보다 훨씬 더 불안한 미래로 내몰리게 된 셈이니까”라고 홍덕구 이사는 말했다.

이처럼 갈수록 상황이 열악해지면서 스스로의 처지를 되돌아보게 됐다고 최병구 이사(성균관대 박사 수료)는 말한다. “석·박사 과정을 정말 열심히 달려왔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위에서 시키는 대로 다하고 논문도 써냈다. 그런데 막상 여기까지 오고 나니 ‘뭐지?’ 하는 생각이 든 거다.” 그 속에서 발견한 이들 스스로의 정체성, 그것은 바로 ‘불안정 연구 노동자’였다.

그렇다면 불안정한 노동을 좀 더 안정된 노동으로 바꾸는 길은 없을까? 대학에서 ‘상아탑에 길들여진 인문학’을 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을까? 이러다 떠올린 것이 협동조합이다. 협동조합은 ‘운동체’인 동시에 ‘사업체’라는 명제가 무엇보다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우리는 단순히 인문학 운동만 하자고 모인 것이 아니다. 인문학적 가치로 수익을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라고 임태훈 이사(성공회대 외래교수)는 말했다.

가능성도 발견했다. 일단은 오덕인문학·연애인문학 등 ‘키워드 인문학’으로 대중과 만나는 것이 먼저다. 초기 단계인 만큼 수강생이 대거 몰리는 것은 아니지만 삶과 소통하는 강좌를 꾸준히 기획하다 보면 수익도 덩달아 나아지리라 기대한다. 올겨울에는 수능을 마친 예비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열려라 대학’ 6회 연속 강좌도 준비 중이다. ‘준비 없이 대학이라는 낯선 세계에 뚝 떨어질’ 아이들을 위해 연애·스펙·돈·여행 등이 갖는 의미를 풀어줄 강좌다(강좌 문의 http://humanecoop.blog.me/). 지방자치단체나 평생교육원 등의 인문학 강좌 프로그램도 중요한 수익원이다. 인문학협동조합은 이미 지자체 몇 곳과 계약을 맺어 인문학 강좌를 기획해주고, 조합원을 강사로 파견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 향후에는 인문학 팟캐스트 방송을 만들거나 정년을 맞은 교수들이 기증한 자료를 라이브러리로 구축해 수익을 내는 방안도 모색 중이다.

강사료로 최소 10만원 보장하는 이유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확보된 수익을 나누는 방식이다. 인문학협동조합이 기획·운영하는 강좌에서는 강의를 하는 조합원은 물론 강좌를 기획한 조합원도 따로 기획비(강사료의 5%)를  받는다. 연구자들의 수고를 당연한 양 착취해온 그간의 관행에 맞서 모든 노동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자는 조합원들의 합의에서다. 그런가 하면 모든 강사는 최소 강사료 10만원을 보장받는다. 수강생이 목표치에 미달되면 곧바로 폐강 절차를 밟는 대학이나 학원과 달리 경쟁과 성과의 잣대에서 벗어난 또 다른 출구를 모색하려는 것이다. 대신 이를 위해 조합원들은 출자금(10만원 이상)과 월 조합비를 내는 것은 물론 조합이 기획한 강좌에 참여할 경우 강사비의 30%가량을 조합비로 내야 한다. “어찌 보면 적지 않은 액수지만 서로 돕고 보호할 수 있는 안전망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 협력과 분담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라고 홍덕구 이사는 말했다.

ⓒ시사IN 신선영‘오덕인문학’ 강좌가 열리던 날 조합원 안혜연씨(왼쪽에서 두 번째)가 ‘메이드복’을 입고 수강생을 맞았다.

결국 이들은 협동조합이라는 틀을 통해 스스로의 노동을 존중받고, 삶과 유리되지 않은 지식으로 대중과 소통하며, 대학 밖의 경로를 통해서도 인문학으로 먹고살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만수 교수는 “이런 젊은 연구자들의 움직임이 학제 간 불통(不通)의 벽에 가로막힌 오늘의 대학에도 긍정적인 자극을 줄 수 있을 것이다”라고 기대했다. 인문학협동조합은 대학 밖의 인문학 공부 모임들과도 연대를 모색 중이다. 내년에 개최하는 것을 목표로 준비하는 ‘지식 팔레트’가 대표적인 예다. 지식 팔레트는 수유너머·다중지성 등 인문학 공부 모임이 한 해 동안 진행한 강좌 중 가장 반응이 좋았던 ‘베스트 오브 베스트’ 강좌를 묶어 대중이 한꺼번에 맛볼 수 있게 하려는 기획이다. 일종의 인문학 강좌 비엔날레라고도 할 수 있다.

관건은 인문학협동조합의 이런 시도에 연구자나 대중이 얼마나 호응하느냐이다. 석사 과정 대학원생인 조합원 정 아무개씨는 “이런 일을 하다 지도교수 눈 밖에 나진 않을까라는 두려움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인문학협동조합을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부딪친 것도 냉소였다고 홍덕구 이사는 말한다. ‘그런다고 뭐가 바뀌겠어?’ ‘그 시간에 논문 한 자라도 더 쓰는 게 낫지 않겠어?’라는 식의 반응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냉소는 힘이 없다”라고 그는 잘라 말한다. 대신 자신들은 번거롭지만 스스로의 체질을 개선해 세상을 바꾸는 길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기획한 첫 강좌 오덕인문학의 부제는 “누구도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였다. 어쩌면 이는 조합원들이 스스로에게 들려주고 싶은 다짐이었을지도 모른다.

기자명 김은남 기자 다른기사 보기 ke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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