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주인입니다.”

경기도 성남시 복정고등학교 매점에는 이런 문구가 붙어 있다. 학교 주인은 학생이니 모두가 주인의식을 갖자, 뭐 그런 상투적인 문구가 아니다. 실제로 이 학교 매점 소유권은 학생, 그리고 교사와 학부모에게 있다. 매점이 협동조합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조합의 정식 명칭은 복정고 교육경제공동체 사회적협동조합. 여기 가입한 사람이 350여 명인데, 이 중 학생이 300여 명이다. 전교생(750여 명)의 절반가량이 조합원인 셈이다. 나머지는 교사와 학부모다.

대학 생협이야 어느 정도 일반화되었다지만, 중·고교 단위에서 이렇게 학생들이 대거 조합원으로 참여해 협동조합형 매점을 연 것은 복정고가 처음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시사IN 신선영10월24일 문을 연 복정고 매점 이름은 ‘복스쿱스’다. 조합원들이 다섯 차례 투표를 거쳐 정했다.

일단은 이 학교의 열악한 주변 환경이 발단이 됐다. 복정고는 서울과 성남 경계에 있는 신생 학교다. 2010년 혁신학교로 개교했다. 인근이 그린벨트이다 보니 편의시설이 거의 없다. 문방구는 물론 구멍가게 하나 없다. 이 때문에 학생들이 인근 공사장에 있는 자판기를 이용하곤 했다고 강연수 교사는 말했다. 문제는 여기서 판매하는 과자나 햄버거가 조잡하기 짝이 없었다는 것. 원재료는 물론 제조 연월일도 불분명했다. 그러다 보니 학생·학부모·교사 할 것 없이 안전한 먹을거리를 취급하는 매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강 교사는 “처음부터 협동조합을 만들려고 했던 게 아니라 매점이 꼭 필요하다 보니 여러 방법을 모색하다 협동조합 방식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왜 굳이 협동조합 방식을 택한 것일까. 이제까지 학교 매점은 외부인에게 임대하는 것이 관례였다. 특히 계약 금액이 2000만원 이상인 매점은 매년 공개입찰을 해야 하고, 입찰 시 최고가를 써낸 업자에게 매점을 임대하게끔 되어 있었다. 이런 최고가 입찰 방식으로 인해 상당수 학교 매점이 학생 복지보다는 영리 추구를 우선해왔다고 김명신 서울시의회 교육위원은 지적한다. 이들 매점이 투자한 돈을 회수하기 위해 마진이 높되 ‘값싸고 질 낮고 열량 높은’ 싸구려 간식을 판매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는 것이다. 학교는 학교대로 이를 눈감아왔다. 일부 학교의 경우 매점 임대 사업비가 학교 운영비의 10~15%에 달하는 만큼 문제에 손을 대기 어려운 구조였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는 곤란하다는 것이 복정고의 판단이었다. 그렇다고 학교 직영으로 매점을 운영할 처지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교사·학생·학부모가 힘을 합쳐 협동조합 방식으로 매점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궁리하던 차에 때마침 협동조합기본법이 통과됐다. 이어 성남시가 지난 2월 학교 협동조합을 설립할 시범학교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내자 복정고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시범학교로 선정된 뒤, 복정고는 협동조합 설립 절차를 본격적으로 밟기 시작했다. 일단은 학내 조합원을 모집하고, 1인당 5000원 이상 출자금을 모았다. 가정통신문을 통해 학부모 참여도 유도했다. 그렇게 조합원 350명(출자금 252만원)을 모아 협동조합 창립총회를 치른 것이 지난 6월. 그로부터 4개월여 만인 지난 10월24일 마침내 협동조합이 만든 첫 사업체로 매점 ‘복스쿱스’(Bok’s Coops)를 개소하게 된 것이다.

정식 개소에 앞서 시범 운영을 하던 복스쿱스를 찾아간 10월18일 오후. 매점의 물품 진열대는 왠지 빈약해 보였다. 알고 보니 이날 들여놓은 과자며 음료가 거의 팔려 물품이 쌓여 있지 않은 것이었다. 특히 90개를 들여놓은 빵은 점심 무렵 이미 동났다고 했다. 남은 새우과자, 콘칩, 와플, 초콜릿, 우유, 주스 등을 들여다보니 대부분 한살림이나 아이쿱 등 생협에서 생산한 것들이었다.

이사회는 학생·학부모·교사 12인으로 구성

매점 매니저 송미경씨에 따르면, 복스쿱스에서 취급하는 간식의 80%는 착향료나 식품첨가물을 최소화한 친환경 물품이다. 재료 또한 대부분 국내산이다. 그렇다 보니 과자가 900~1800원, 주스가 500~1100원대로 가격이 만만치 않다는 게 문제다. 그렇다고 매점에 이윤이 크게 남는 것도 아니다. 친환경 물품의 경우 마진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이들 건강에 좋은 먹을거리를 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한다. 좀 부담이 될지라도 친환경 매점으로 가야 한다는 데 학부모·학생들의 의견이 거의 일치했다”라고 황성경 이사장은 말했다. 복정고 협동조합 이사회는 학생·학부모·교사 이사 12인으로 구성되는데, 황 이사장은 학부모를 대표하는 이사 중 한 사람이다.

ⓒ시사IN 김은남협동조합 홍보 캠페인을 준비하는 복정고 학생 조합원들. 4개 분과로 나뉘어 매점 개소를 준비했다.

이는 협동조합 특유의 속성에서 기인한다. 복정고는 특히나 협동조합 중에서도 공익성을 중시하는 사회적 협동조합 형태를 선택했다(사회적 협동조합의 경우 일반 협동조합과 달리 공익사업 비중이 40% 이상이어야 한다). 곧 이윤 추구가 협동조합의 일차적 목적이 아닌 데다, 이윤이 남더라도 학생 복지 등에 환원하기로 약속이 돼 있는 만큼 ‘믿을 만한 먹을거리를 제공한다’는 본래의 매점 설립 목적에 충실할 수 있는 것이다.

협동조합의 더 큰 묘미는 ‘1인1표’라는 의사 결정 방식에서 나온다. 가진 주식 수만큼 의결권을 행사하는 주식회사와 달리 모든 조합원이 동등하게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것이 협동조합의 특성이다. 이를 학교 버전으로 바꾸면, 교사나 학생이나 나란히 1표를 행사한다는 얘기가 된다. 이게 말처럼 쉬울까? “기존 논의 과정을 보면 겉보기엔 민주적인 것 같아도 결국 모든 결정은 선생님들이 내리곤 했다”라고 학생 대표 이사인 서우남군(3학년)은 말한다. 학급회의나 학생회에서 의견을 모아 전달해도 교사-교감-교장으로 이어지는 결재 라인을 통과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실행되지 않는 구조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협동조합은 달랐다. 일단 이사회에서 만난 교사나 학부모가 자신을 ‘서우남 이사’라고 부르며 동등하게 대우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매점 운영을 개방식으로 하느냐, 폐쇄식으로 하느냐를 놓고 격론을 벌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른들은 대체로 너도나도 매장에 들어와 물건을 고를 수 있는 개방식을 지지했다. 신뢰를 중시하는 협동조합의 정신에 따르자는 이상론이었다. 반면 학생들은 도난 사건이라도 발생할 경우 오히려 신뢰를 해칠 수 있다며 폐쇄식을 지지했다. 창립총회 직후부터 벤치마킹팀·교육팀·공간기획팀 등으로 나뉘어 분과 활동을 벌이던 학생 조합원들은 스스로 인근 학교의 실태도 조사하고 나섰다. 그 결과 점심시간이면 매점마다 통상 100여 명이 몰리고, 따라서 개방식으로 하면 혼잡이 더 심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논쟁은 결국 학생들의 의견을 수용하는 것으로 끝났다.

교복 공동구매·공정 수학여행 등 추진할 계획

매점에 들일 물품을 고를 때도 마찬가지였다. 학생 조합원들은 사전 시식회를 연 다음 자기들이 먹을 간식을 투표로 정했다. “우리 의견이 하나하나 반영돼 현실로 나타난다는 것이 신기하고 뿌듯했다”라고 2학년 박선하양은 말했다.

복정고 협동조합은 향후 교복 공동구매나 수학여행·공정여행 프로그램 등도 추진할 계획이다. 조합원에게 이득이 될 사업들이다. 관건은 매점이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느냐이다. 성남시와 경기교육청은 복정고 등 시범사업을 토대로 학교 협동조합 표준 모델과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다른 학교가 복정고 모델을 따라하기에는 난관이 적지 않다. 당장 임차료부터가 부담이다(복정고는 연간 400만원). 현행법상으로는 아무리 협동조합형 매점이라도 학교 등 공유재산을 이용할 때 임차료를 내야 한다. “남는 수익으로 장학금 등을 지급한다는 게 목표였는데, 임차료를 물고 나면 인건비조차 건지기 어려울 듯하다”라고 강연수 교사는 말했다.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사회적 협동조합의 경우 관련 규정을 완화해서 적용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학생이 조합 활동을 하기도 쉽지 않은 구조다. 복정고의 경우 조합원으로 가입한 학생 300여 명이 복잡한 등기 절차를 밟느라 진을 빼야 했다. 이사로 선출된 학생들에게는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훨씬 더 복잡한 공증 절차가 요구됐다. 이래서는 청소년들이 협동조합 조합원으로서 산 체험을 하기 어렵다.

세계적으로 볼 때 학교 협동조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유럽이나 미국 일부 학교처럼 학교 자체를 협동조합으로 운영하는 형태다(46쪽 관련 기사 참조). 다른 하나는 복정고처럼 학교 내에 협동조합을 설립해 다양한 사업을 운영하는 형태다. 어느 쪽이든 민주주의에 기반한 소통 방식을 익히는 데 유력한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박주희 한국협동조합연구소 연구원은 말했다. 흔히 1인1표제는 협동조합의 강점이자 약점으로 지적된다. 의사 결정에 이르는 시간과 비용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약점이 오히려 교육의 기회로 승화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학교 협동조합의 매력이자 승부처다.

기자명 김은남 기자 다른기사 보기 ke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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