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관광의 폭이 넓어지면서 최근의 한국 관광객들은 캄보디아를 방문해 밀림 속에 버려졌던 앙코르와트 궁전을 보고 감동하고, 24시간 이상의 비행을 감내하며 페루의 쿠스코와 마추픽추에 가서 사라진 잉카 문명을 상상하는 격조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서울에도 앙코르와트나 마추픽추와 같이 산속에 감추어진 역사 유적이 있다면?

서울시내 성곽 주변에는 조선 시대 선비들의 철학과 사상을 담은 각석(刻石)이 산재해 있지만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각석은 돌에 새긴 글자를 뜻하는 것으로 금석문(金石文)의 한 종류지만, 비석과는 달리 산에 있는 바위에 글을 새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석은 바위가 위치하는 공간의 의미와 특성이 그대로 반영된다. 한 예로 달빛을 잘 반사하는 북악산 바위에는 ‘월암(月巖)’이라는 글자가 쓰인 각석이 있다. 인왕산 계곡의 물줄기 세 개가 하나로 모여들어 회오리치는 곳에는 ‘삼계동(三溪洞)’이라고 쓰인 각석이 있는데 그곳은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이 있었던 곳으로 현재는 서울미술관이 자리한다.

ⓒ이창현 제공인왕산 수성동 계곡 주변에는 조선 시대 각석이 많이 있다.
또 ‘백세청풍(百世淸風)’과 ‘백운동천(白雲洞天)’이라는 각석에서 우리는 청운동이라는 지명이 어떻게 유래되었는지를 짚어볼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각석의 위치를 통해 지금은 대부분 사라진 조선 시대의 활쏘기 터가 어디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 내려서 사직단을 구경하고 인왕산으로 향하다 보면 황학정 8경이라는 각석을 접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언급한 8경을 통해 당시 주변의 풍경을 떠올려볼 수 있다.

또 바로 옆에 조선 시대 활쏘기 터의 하나인 ‘등과정(登科亭)’이 있었다는 것을 각석을 통해 알 수 있고, 서촌 주택가의 길을 따라 내려가면 ‘백호정(白虎亭)’이라는 이름의 각석이 있어 그곳 또한 과거에 활쏘기 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각석은 공간의 특성을 잘 알려주는 아이콘인 셈이다.

스트레스가 가득하다면 ‘일세암’을 권함

무엇인가 일상의 스트레스에 가득 차 있다면 ‘일세암(一洗巖)’에 가서 세상의 모든 고민을 씻어버리기를 권한다. 지금은 안타깝게도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잡목이 무성하고 쓰레기 더미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야만 볼 수 있지만, 이곳에 가면 세속의 모든 풍진을 한번에 씻어버린다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체험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한편 부암동에 가면 폐허의 대지 위에 ‘무계동(武溪洞)’이라 쓰인 각석을 접할 수 있다. 이곳은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꿈에 본 무릉도원과 같다고 하여 정자를 짓고 무계정사로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가 썼다는 무계동이라는 글자만이 남아 그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

서울의 급속한 도시개발 과정에서 과거의 역사 건축물이 많이 훼손된 것이 사실이지만, 각석은 산속 바위에 새겨져 있어 다른 것에 비해 원형이 잘 보존된 편이다. 다만 우리가 아직 그것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이야기로 계승하지 못했을 뿐이다.

각석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추구했던 조선 시대 선비들의 가치와 사상이 함축적으로 담긴 역사적 보물이다. 우리는 각석을 통해 옛 선비들의 세계관을 시간을 초월하여 느낄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각석의 가치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 시대 이전부터 전승되어온 가치와 철학을 담은 각석은 천년의 소리를 담고 있다. 그 천년의 소리를 들으며 서울의 각석을 따라 역사를 되새기는 ‘수학여행’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앙코르와트나 잉카 문명에 뒤지지 않는 이야기와 감동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기자명 이창현 (서울연구원 원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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