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대상은 ‘임 여인’이 아니었다. 데스크는 그녀를 감금하다시피 한 기자들을 취재하라고 지시했다. 10월1일 오후 3시, 임 여인이 거주한다고 알려진 그녀의 외삼촌 집(경기도 가평군의 한 아파트 3층)에 도착하자, 〈조선일보〉 〈중앙일보〉 〈국민일보〉 기자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파트 현관문에 바짝 귀를 댄 채, 이른바 ‘벽치기’를 하고 있었다. 다른 기자들은 몇 걸음 떨어진 계단 근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간혹 문 앞에 자리가 나면 다른 기자들이 번갈아가며 귀 대기를 반복했다.

9월30일 밤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내연녀로 추정된다는 임 아무개씨가 이곳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기자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채 전 총장 혼외 아들 의혹을 처음 보도한 〈조선일보〉는 이미 일주일 넘게 이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아파트 주민들은 임씨의 자동차로 추정되는 ‘낯선’ 벤츠 승용차가 10여 일 전부터 세워져 있었고, 그 며칠 후 〈조선일보〉 차 세 대가 나타났다고 말했다. 〈조선일보〉는 4~5명이 돌아가며 24시간 취재를 이어왔다고 한다. 〈조선일보〉에 이어 도착한 한 기자는 “나는 차를 멀찌감치 대놓고 접근했는데, 〈조선〉은 마치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시위하듯 차를 임 여인 집 가까이 대놓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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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신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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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신선영

10월1일 오후부터 10㎡가량 되는 아파트 복도에 기자들이 자리를 깔고 앉기 시작했다. 방송기자들이 뒤이어 올라와 ‘보도용 영상’을 찍어갔다. 저녁 시간이 되자 기자들이 하나둘 자리를 떴다. 〈조선일보〉, TV조선, 〈중앙일보〉 등은 퇴각하지 않았다. 밤 9시 무렵 갑자기 한 기자가 현관문을 두드리며 “〈한겨레〉랑은 통화했잖아요. 이 아줌마가 진짜…”라며 항의했다. 이날 저녁 〈한겨레〉는 임씨와 전화로 단독 인터뷰한 내용을 온라인으로 먼저 내보냈다. 조·중·동 소속의 한 기자는 “채동욱 총장처럼 ‘공인’도 아닌 ‘사인’ 집 앞에서 도대체 내가 뭔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자조했다.

주요 방송사들은 풀단(공동취재단)을 짰다. 각 사별로 돌아가며 지킨 뒤 촬영한 영상은 서로 공유하자는 것이다. 밤 10시께 당번을 맡은 YTN 촬영기자가 현관문 앞에 아예 의자를 놓고 등을 기댔다. 안에서 문을 열고 싶어도 못 열 상황이었다. 방송사 당번 외에 〈조선일보〉 〈중앙일보〉, TV조선, 채널A, JTBC 등이 이날 밤 아파트 앞에서 밤을 새웠다.

다음 날 아침, 전날보다 더 많은 취재진이 일찍부터 현관 복도에 의자를 펼쳤다. 10월2일 〈중앙일보〉는 집 안에서 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며 “무엇보다 나쁜 건 자기 자식을 부정한 거라고…” 따위 대화 내용을 보도했다. 이 기사가 나간 뒤 취재 인원이 는 것이다. 한 기자는 “〈중앙〉에서 어쨌든 새 취재 내용이 나왔으니 뒤따라 올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신선영‘임 여인’이 머물고 있다는 ‘임 여인 외삼촌’의 아파트 앞에서 취재진이 진을 치고 있다.
ⓒ시사IN 신선영‘임 여인 외삼촌’의 아파트 앞에서 TV조선 기자가 중계방송을 하고 있다.

복도에 사람들이 늘어나자 이날 오후 주민대표가 취재진에게 철수를 요청했다. 주민들이 불편해하니 건물 밖에서 기다려달라는 요청이었다. 현관문 앞에서 철수한 직후 공중파 방송들은 풀단을 꾸리고 당번을 정해 움직이기로 했다. 당번이 정해지자 일부 취재진이 차를 몰고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주민 대표의 요청 이후 대부분의 기자가 밖에서 대기했지만, JTBC 기자가 홀로 현관문에 귀를 대기 시작하자 〈조선일보〉 〈한겨레〉, TV조선 기자도 건물 안으로 다시 올라갔다. CCTV로 상황을 지켜보던 관리사무소 직원이 다시 올라와 승강이가 벌어졌다. 밤이 되자 〈한겨레〉 〈중앙일보〉 〈조선일보〉, TV조선, JTBC 기자들은 밖에서 밤샘을 준비했다. 이날 저녁 임씨 집 앞을 지키던 기자들의 사진이 한 포털 사이트에 떴다. ‘감금 취재’ ‘인권 유린’ 따위 댓글이 주렁주렁 달렸다.

10월3일 보도 인원이 그나마 줄었다. 전날 철야한 매체에 〈경향신문〉만 추가되었다.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길고 지루한 버티기가 이어졌다.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혔고, 불은 켜지지 않았다. 기자들도 떠나지 않았다. 한 기자는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한 절대 안 나온다”라고 말했다.

밤까지 이어진 대기 상태를 바라보던 한 주민이 불평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링 위에서 잽 얻어맞고 떠난 채동욱을 〈조선일보〉가 다시 링 위로 끌어올리려 하잖아.”


기자명 김동인 기자 다른기사 보기 astori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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