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신이치는 황대권을 ‘바우 상’이라 불렀다(바우는 황씨의 세례명이다). 황대권은 쓰지 신이치를 ‘쓰지 선생’이라 불렀다. 바우 상과 쓰지 선생.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다. 〈야생초 편지〉를 쓴 황대권이나 〈슬로 라이프〉를 쓴 쓰지 신이치나 밀리언셀러 작가로 국내외에 많은 독자를 거느리고 있다.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문명의 속도와 방향에 대해 근본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인류 보편의 공감대를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도 둘은 닮았다.

그 두 사람이 만났다. 쓰지 신이치가 제작 중인 DVD북에 황대권이 출연하게 됐기 때문이다. 쓰지 신이치는 몇 년 전부터 아시아에서 주목할 만한 생태 사상가들의 삶과 철학을 영상에 담아 보급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이름하여 ‘나무늘보 DVD북 시리즈’다. 황대권은 그 세 번째 주인공이다. DVD북 완성을 기념해 한국을 찾은 쓰지 신이치와 황대권을 10월1일 서울 중림동 〈시사IN〉 회의실에서 만났다. 이날 광화문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린 국내 첫 시사회 도중 관객과 오간 대화 내용도 일부 덧붙인다.

ⓒ시사IN 조남진쓰지 신이치 씨(오른쪽)는 생태 사상가들의 삶과 철학을 영상에 담아 보급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황대권씨(왼쪽)가 세 번째 주인공이다.
사회:쓰지 씨에게 먼저 묻겠다. 아시아의 생태 사상가들을 소개하는 DVD북을 만들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쓰지 신이치(쓰지):1998년 ‘나무늘보와 친구들’을 만들고 슬로 라이프 운동을 전개하면서부터 내 나름 환경사상을 모색해왔다. 그런데 문명의 위기에 직면하면 할수록 서양의 에콜로지(생태·환경사상)를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걸 느꼈다. 그 결과 눈을 돌린 것이 로컬(지역)이다. 먼 곳에서 온 사상이 아니라 동양, 특히 동아시아에서 출발한 에콜로지를 재발견하는 것이 미래를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가이아 심포니’라는 영상 시리즈를 만든 내 소꿉친구 혼다 시게루와 이런 얘기를 하다 기왕이면 이걸 DVD로 만들어보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사회:한국 사상가 중 황대권씨에게 주목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쓰지:한국의 생태 사상가로 처음 접한 이는 김지하 시인이다. 민주화 운동이나 인권·평화 운동을 에콜로지와 결합해 사고하는 데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일본에는 이런 사상이 드물다. 그러나 김 시인은 책 한 권 읽은 게 전부인 데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여러 복잡한 요소가 있었다. 황대권 선생은 좀 달랐다. 2007년 피스앤그린보트에서 만난 한국인 친구들이 소개해줘 〈야생초 편지〉를 찾아 읽게 됐는데, 책을 읽으면서 이분을 촬영해야겠다고 바로 결심했다. 그의 사상에는 언어와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무언가가 담겨 있다. 세계 여러 나라 친구들한테 황 선생을 소개할 때마다 ‘아’ 하고 즉각 반응이 오는 걸 경험한다.

사회:황대권 선생님은 DVD북 작업에 참여하는 게 처음인가? 황대권(황):외국 방송에서 여러 번 (다큐멘터리 등을) 찍어간 일이 있어서 영상 작업이 낯설지는 않았다. 다만 이분이 워낙 생태 분야에서 대단한 저술가이다 보니 인터뷰의 논리나 깊이, 이런 것들이 굉장히 잘 준비돼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찌나 꼼꼼하게 준비를 했던지 아주 놀랐다. 쓰지:처음 인터뷰하던 날은 고문실에 있는 것 같다고 하시더라(웃음).

황대권을 얘기하면서 감옥 체험을 빼놓을 수는 없다. 이른바 학원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13년2개월간 옥살이를 하는 동안 그는 야생초를 만났다. 야생초는 모진 고문으로 망가진 몸을 낫게 해준 은인이자 그의 세계관을 바꿔놓은 스승이었다. 오만한 인간중심주의를 벗고 야생초의 눈높이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서 그는 생명 하나하나가 귀천 없이 그 자체로 소중하며, 모든 생명이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DVD북은 이런 그의 체험에서부터 얘기를 풀어나간다. 대전교도소에서 시작된 로케이션은 어느덧 출소 이후 그가 농사를 지으며 사는 전남 영광을 거쳐 일본으로 이어진다. 사회:DVD를 촬영하는 동안 두 분이 함께 오키나와 미군기지나 규슈 겐카이 원전 등도 들렀던데 한국과는 상황이 어떻게 다르던가?

나무늘보 DVD북 시리즈 1편은 인도의 사티쉬 쿠마르(<지금 여기에 있는 미래>), 2편은 일본의 가와구치 유이치(<자연농업이라는 행복>)를 다뤘다. 황대권을 다룬 3편은 사회적 기업인 씨네에그가 국내 배급을 맡았다(왼쪽부터). DVD 상영 문의는 010-4505-3888.
:현장에서 오랜 기간 반대운동을 벌여야 하는 주민들은 성정이 거칠어질 수밖에 없다. 지난해 영광 원전에서 불량 부품 문제 등이 불거지면서 내가 어쩌다 주민 조직(영광핵발전소안전성확보공동행동) 대표를 맡게 됐는데, 처음에 당황했던 것이 무슨 사안만 터졌다 하면 바로 투쟁부터 하려 드는 관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아무도 믿지 못한다. 정부나 원전은 물론이고 주민끼리도 못 믿는다. 원전 쪽에서 끊임없이 돈으로 주민들을 매수하려 드니까. 오키나와 사람들도 이런 세월이 쌓이면서 다들 피폐해져 있더라. 그러나 뭔가에 반대하고 투쟁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다 함께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생태적 대안을 찾으려 궁리해야지, ‘내 생각만 옳고 이거 아니면 다 반대’라는 식을 고집하다가는 결국 힘센 쪽이 이기고 힘없는 쪽은 만날 패할 수밖에 없다.

사회:문제는 센 쪽에서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 것 아닌가. 밀양만 해도 송전탑을 둘러싼 여러 대안을 주민들이 제시했지만 결과는 바뀐 게 없다.

“센 사람이 왜 센지 생각해보라”

:센 사람들이 왜 센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들이 폭력·무력을 쓸 수 있는 건 사람들이 가만히 있기 때문이다. 국민 대다수가 이걸 남의 문제로 받아들여서다. 그러니 약자들은 억울해도 더 지혜로워져야 한다. 국민들이 이걸 내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게끔 만들어야 한다. 주먹 쥐고 구호 외친다고 이게 될까? 아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힘이 없어서 졌나? 여론을 얻지 못해 진 것이다. 그러니 약자들은 반대편에 있는 상대조차 끌어안으려 노력하면서 진실한 몸짓으로 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내려 해야 한다. 영광에서 활동하면서 나는 반핵이나 탈핵 같은 용어를 쓰지 않는다. 대신 원전의 안전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안전성을 확보하는 건 보수건 진보건, 영광 주민이건 원전 직원이건 누구나 원하는 바 아닌가. 핵을 없애는 건 내 삶의 목표가 아니다. (신규 원전을 짓지 않는다 해도) 핵은 자손 수백 대를 거쳐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미 싸놓은 똥이니까. 그렇다면 핵으로부터 벗어나는 걸 지향하되 그 조건 속에서 모든 생명이 어떻게 평화롭게 공존할 것인지 머리를 맞대고 최대한 모색해보자는 거다.

쓰지:반대운동을 넘어서는 것은 내게도 오랜 과제였다. 뭔가에 분노하고 반대하는 한편에서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세상이 다 나빠도 나는 나쁘지 않다, 그러니 나는 책임 없다는 식이랄까? 겐카이 원전을 방문했을 때 황대권 선생이 “참 무책임하다”라고 짧게 중얼거리는데, 나는 그게 우리 자신을 향한 말로 들렸다. 3·11 이후 일본에서 열린 반원전 집회에 참가한 한 젊은 여성이 “지금까지 고마웠어, 도쿄전력”이라 쓰인 손팻말을 들고 나온 걸 본 일이 있다. 이들은 아는 거다. 도쿄전력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이제껏 편리함만을 추구해온 우리, 풍요함을 위해 세계를 파괴해온 우리가 문제의 근원이었음을 먼저 인정해야만 그 체제에 제대로 안녕을 고할 수 있다는 것을.

ⓒ도솔출판사 제공황대권씨(58)는 전남 영광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명평화마을이라는 공동체를 일구고 있다.
:그런데 1970~1980년대식 운동 습관이 몸에 밴 사람들에게는 이런 전환이 극히 어려운 것 같다. 이석기 사건은 이것이 아주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난 예일 테고. 집회 현장에 가면 나보고 사이비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다. 쓰지:나보고도 ‘종교 시작했냐’고 묻는 친구들이 있다. 그럼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슬로교’라고 들어봤어?”라고 맞장구를 쳐준다(웃음). 나는 그래도 한국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현대사 속에서 싸움을 통해 민주주의를 이뤄내고, 민주주의 후퇴에 끊임없이 저항하면서 한 걸음 또 한 걸음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에 비하면 일본인에게 느끼는 것은 사상의 나약함이다. 3·11 이후 특히 그런 걸 느낀다. 내가 아는 유명한 반원전 이론가가 있는데 후쿠시마 사고가 터지자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방사능이 원전을 추진한 사람들 머리 위에만 떨어지면 좋을 텐데.” 거기에는 친원전파에 대한 미움과 ‘거봐, 내 말이 맞았잖아’라는 우쭐함만 있을 뿐 고통받는 생명에 대한 고뇌는 없다. “지금은 보수 물결이 흐름을 탄 순간”

사회:이번 DVD북 제목이 ‘라이프 이즈 피스(Life is peace)’이다. 그러나 최근 동아시아 상황은 점점 더 두 분이 화두로 삼는 평화를 위협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답하기 조심스러운데…. 나는 정권을 진보가 잡느냐, 보수가 잡느냐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바다에 가면 파도가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듯 지금은 보수의 물결이 세계사적인 흐름을 탄 순간이겠지. 우리도 진보 정권 10년을 겪어봤지만 정권을 누가 잡느냐에 따라 근본적인 차이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 않나.

쓰지:내가 지난해 돌아다닌 나라가 17개국인데, 어느 나라든 정치 상황이 엉망이었다. 정치 리더의 질도 최악이었다. 그러다 보니 일본이나 한국처럼 자기가 속한 나라에 대해 의심하고 실망하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그러나 눈을 돌려보면 변화의 조짐 또한 뚜렷하다. 어디서나 과거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탈(脫·벗어남)’이다. 나는 ‘탈’이야말로 우리가 가고 있는 길,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설국열차〉지. 기차로부터의 탈출.

‘탈’을 꿈꾸되 세상이 쉽게 바뀌지는 않을 거라며, 지레 낙담하거나 주저앉는 이들에게 둘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논의는 자연스럽게 미래와 젊은 세대에 대한 얘기로 이어졌다.

ⓒ시사IN 자료<슬로 라이프>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쓰지 신이치 씨(61·오른쪽)는 한국계 일본인으로 한국 시민사회와도 활발히 교류 중이다.
사회:DVD북에 보면 “왜 사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라고 호소하는 일본 젊은이가 등장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세계가 너무 방대해지고 관료화되지 않았나. 그 위에 1%대99%의 철저한 계급화가 이루어지면서 물려받은 기득권 없이는 철옹성 같은 그 속을 뚫고 들어갈 수도 없게 됐다. 그러다 보니 고통을 잊으려 즐기거나, 반대로 고통을 못 이겨 자살하거나 하는 극단의 모습이 생겨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젊은이들에게 인생 선배로서 해주고 싶은 말은, 내가 전체와 연결된 존재임을 잊지 말라는 거다. 내가 감옥 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것도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동안에는 철창 너머에 있는 귀뚜라미나 갇혀 있는 나나 같은 공기를 마시면서 모든 생명이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쓰지:일본 젊은이들이 자주 쓰는 말이 ‘의미가 없다’이다. 그러나 나는 이들에게 오히려 희망을 본다. 우리 세대나 윗세대는 의미가 없는 일을 의미 있는 일인 양 착각하며 살아왔다. 돈을 벌기 위해 가족과 함께할 시간을 희생하고 생태계를 파괴해왔다. 그런데 이런 게 의미가 없다는 것을 누군가 급기야 깨닫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것은 요즘 일본 젊은이들에게 ‘있을 자리를 만들어주자’는 움직임이 인다는 거다. 한 예로 택로소(宅老所·노인을 돌보는 사회복지시설)에서 노인·외국인·싱글맘·장애인 등과 함께 사는 젊은이가 늘고 있다. 여기에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구분이 없다. 그저 마음에 맞는 사람을 돌보고 자신 또한 누군가의 돌봄을 받을 뿐이다. 귀농하는 젊은이도 많다. 이들이 농사에 특별한 뜻을 두었을까?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직감적으로 이 길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 거다. 사람은 의미 없이 살 수 없는 동물이다. 그러니 주류에서 벗어난 곳에서 자기 자리를 만들며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거다.

“그 밖에 다른 사치는 바라지 않겠습니다” :내가 왜 태어났을까? 결국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나만의 자리를 찾아가기 위해 태어난 거다. 그런데 불행히도 대부분의 사람이 이 자리를 못 찾고 엉뚱한 데를 헤매다 죽는다. 90%가 객사하는 셈이다. 왜 그럴까. 욕망에 매달려 살기 때문이다. 인간은 머리가 발달해 있어 끊임없이 자의식과 욕망을 좇게 돼 있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몸으로 사는 게 중요하다. 쓰지:황 선생은 우리가 인간의 눈높이에서 벗어나 야생초의 눈높이로 내려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나는 이걸 보텀 라인(bottom line·최저선)이라 표현하고 싶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젊은 엄마들이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들었다. “아이들에게 부디 깨끗한 물과 공기, 흙, 그리고 안전한 음식을 주십시오. 그 밖에 다른 사치는 바라지 않겠습니다”라고.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결국 이 같은 최저선을 들여다보고, 그 길로 내려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통역:김수향(카페 수카라 대표), 녹취:송지혜 기자

기자명 김은남 기자 다른기사 보기 ken@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