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시원함을 징발했다. 8월12일에서 14일 사이에 절정을 이루었으나 기본적으로는 여름 내내 계속된 동원이었다. 정부가 동원한 게 에너지가 아니라 시원함이었다는 건 이 절전 캠페인이 올여름 가장 더운 기간에 가장 뜨겁게 달아올랐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장마가 계속된 8월 초까지는 큰 무리가 없었으나 폭염과 열대야가 이어진 8월 중순에 이르러 전력 수급 위기에 관한 이야기가 열기를 더해갔던 것이다. 물론 그보다 더 극단적인 증거도 있다. 바로 여름 내내 지속된 공공기관의 다소 자학적인 전기 절약 캠페인이다.

‘냉방 금지’라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조치들이 내려졌고, 공무원들의 절규가 소문으로 혹은 미디어를 통해 전해지곤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공공기관에 갈 일이 있었던 사람들은 그 더위를 잠시나마 체험하고 오기도 했다. 우체국이나 기차역, 지하철역 등 시민들이 이용하는 시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상황은 비슷했다. 더웠다. 그렇게 시원함이 징발되었다.

그리고 똑같이 무더웠던 8월15일 광복절에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휴일이 되자 전력 위기 이야기가 쑥 들어가버린 것이다. 그 떠들썩한 비상사태는 놀면 없어지는 비상사태였다. 애초에 그 호들갑이 8월12일에서 14일까지 절정을 이룬 이유도 그와 같았다. 전주인 8월5일 월요일부터 8월9일 금요일까지는 직장인들의 휴가가 집중된 기간이라 큰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다. 어마어마한 위기라고 선전을 하기는 했으나 휴일이 되면 저절로 해결되는 위기였고, 사실은 임시 휴일을 선언할 만큼 절박하지는 않은 위기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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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가장 무더웠던 며칠간, 그렇게 두 가지가 동시에 징발되고 있었다. 더위를 피해 쉴 권리, 그리고 시원함이었다. 여름휴가 기간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법정 휴가일수 15일이 충분히 활용되었다고 믿을 직장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가장 더운 날, 시원함에 대한 수요가 가장 많을 것으로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날, 피서에 대한 수요도 똑같이 많아서 둘 중 하나만 충족됐어도 그런 비상식적인 더위는 겪지 않아도 됐을 그 며칠간, 기업들은 생산을 멈추지 않았다. 징발된 시원함을 에너지로 바꿔서 생산시설을 계속 돌렸다.

에어컨을 사되 쓰지는 말라고?

그 대신 국가는 국민에게 죄책감을 전가했다. 전부터 있었던 징벌적 전기요금에, 블랙아웃이니 전력예비량이니 하는 말들이 주는 스트레스가 더해졌다.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 무작위로 스위치를 내려버릴 수도 있다는 경고가 뒤따랐다. 말이 좋아 경고지, 협상의 여지라고는 없는 벼랑 끝 전술이고 일종의 협박이었다. 그 결과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남게 되었다. 올해 전력 수급 위기가 정부 영역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일단 넘어가더라도,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생겨버렸다.

매년 국가가 하고 있는 징발 구조상, 기업이 에어컨을 만들어서 많이 파는 건 좋은 일이다. 바꿔 말하면 소비자가 에어컨을 많이 사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에어컨을 가동하는 것은 나쁜 일이란다.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일이 돼버린 것이다. 그럼 사놓은 에어컨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아니, 올해처럼 선풍기도 되도록 쓰지 말라는 말이 나오는 날에는 도대체 뭘 어쩌란 말인가.

자유주의라는 말을 떠올려본다. 국가가 이런 무리한 방식으로 사적 영역으로부터 시원함 따위를 징발해가는 동안 그 많은 자칭 ‘자유주의자’들은 어디서 뭘 하며 더위를 식히고 있었을까.

기자명 배명훈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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