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같은 만화가.’ 만화가 이희재씨가 박시백 화백을 두고 한 말이다. 그렇게 부를 만하다. 2003년 7월에 1권 〈개국〉을 출간하고 2013년 7월에 20권 〈망국〉을 출간하며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완간했으니 말이다. 첫 출간에서 완간까지 10년이 걸렸다. 1년에 두 권씩. 소처럼 무던하게 ‘만화 농사’를 지었다. 박시백 화백은 “서른 후반에 시작한 일이 쉰이 되어서야 끝났다”라고 말했다.

박 화백이 조선사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건 1998년. 〈한겨레〉에서 시사 만평가로 활동하던 시절. 〈왕과 비〉라는 역사 드라마를 즐겨 보았는데, 배경지식이 너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 신문사 자료실에서 조선사 관련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2000년, 자연스레 조선사를 만화로 그려보면 어떨까 싶었다. 때마침 〈한겨레〉에 당시에 수백만원 하던 ‘조선왕조실록 국역판 CD’를 할인해 판다는 광고가 실렸다. 무언가 운명처럼!

<한겨레>에서 시사 만화가로 활동했던 박시백 화백(위)은 2001년 조선왕조실록을 만화로 그리겠다고 결심하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2001년 4월 조선왕조실록을 만화로 그리겠다고 마음먹고, 덜컥 회사를 그만두었다. 만화가 박재동 화백은 “내 후임이 된 그가 나는 늘 신경 쓰였고, 그가 〈한겨레〉를 떠난 후에는 어떻게 만화가로서 생활할까 걱정도 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시백 화백은 무엇보다 조선왕조실록을 만화로 그리고 싶다는 열망이 컸다. 2077책에 달하는 방대한 왕조실록. 한글 번역본으로도 400권이 넘는 분량을 읽고 만화로 그리는 작업이었다. 하루 열두 시간씩 조선왕조실록을 공부하고, 그림을 구성하고, 습작했다.

첫 책을 내기도 한참 전, 역사 공부와 습작으로 예열 기간을 가질 즈음에 가슴이 철렁했던 적도 있다. 2001년, 고우영 화백이 한 스포츠신문에 조선사 관련 만화를 연재한다는 거였다. “조선왕조실록을 만화로 하겠다고 주변에 말도 해놓고 회사도 그만두었는데. 다른 이도 아니고, 만화계의 대가 고우영 화백이라니!” 마음 졸였다. 다행히 고우영 화백의 작품은 정사와 야사를 오가는 작품으로 작품 방향이 달랐다. 작품의 대상 기간도 고려 말에서 조선 세종으로 한정되었다.

처음에는 실록을 기반으로 삼고, 잘 알려져 있는 연구 성과를 반영해 만화로 바꾸어 전달하자는 ‘소박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실록을 계속 읽어나가면서 계획을 바꾸었다. 우리가 보통 안다고 여긴 역사적 사실이란 게 실록의 기록과 다른 경우가 많았고, 야사에 근거한 내용이 마치 실록의 내용인 것처럼 오인된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드라마뿐 아니라 대중적 역사서도 그런 경우가 있었다. 가령 황희 정승 같은 경우. “보통 청렴결백의 화신이고, 이쪽도 옳고 저쪽도 옳다고 하는 양시양비론의 원형처럼 인식되는데 실록의 기록에는 달랐다. 뇌물도 받고, 청탁도 많이 하고.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도 확고하게 자기 의견을 정리해서 이야기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한글 창제와 관련해 집현전 학자들이 주역으로 참여했다는 견해에도 의문이 생겼다. “실록을 보면 한글 창제에 가장 강력하게 반대를 한 게 최만리다. 최만리는 당시 누구보다 집현전을 대표하는 신진 학자였다. 일종의 책임자인데, 그 모르게 왕의 밀명을 받고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 창제 일을 했을까?” 이런 이유로 박 화백은 역사적 사실 자체를 온전히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고 느꼈다. 중요한 상소문 같은 것을 통째로 책에 싣기도 한 건 이런 이유에서다.

사전 준비를 꼼꼼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관련 도서를 읽고, 실록에 나타난 왕의 하루하루를 살폈다. 실록을 읽어가며 작품에 들어갈 내용을 노트에 기록했다. 그런 노트만 121권에 달한다. 이 작업이 끝나면 그때부터 콘티를 작성했다. ‘이 작업이 전체 작업의 절반’이라고 작가가 말할 정도로, 시간이 오래 걸렸다.

김대중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읽은 책

이는 만화가, 만화 평론가뿐만 아니라 역사학자들이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호평하는 이유다. 신병주 교수(건국대 사학과)는 “박 화백을 ‘현대판 사관’으로 불러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역사학자 못지않게 많은 공부를 해가면서 집필한 것은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이다”라고 평가했다. 박광용 교수(가톨릭대 인문학부)는 “전체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정밀하게 밝히려 했고, 많은 참고문헌을 바탕으로 다방면에서 공부한 점이 돋보인다. 특히 조선 개국을 서술한 1~3권과 정조의 탕평을 서술한 16권은 완벽에 가까운 수준을 보여준다”라고 평했다.

강명관 교수에 따르면,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한 사건이 단지 그 사건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10년 뒤, 20년 뒤, 100년 뒤에 되풀이되어 인용된다. 그래서 완독하지 않고서는 사건의 갈피를 잡기가 쉽지 않단다. 강명관 교수(부산대 한문학과)는 “(박 화백의 작품은) 사건의 연쇄에서 오는 복잡성을 수월하게 돌파하고 있다. 사건들은 적절한 층위에서 선택되고, 요령 있게 배치되어 있어서 쉽게 전체적인 면모를 파악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만난 독자는 70여만 명.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읽은 책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의 책상 위에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4권 62쪽이 펼쳐져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의 일기에는 “박시백 화백이 만화로 그린 조선왕조실록을 읽고 있는데 재미있고 참고가 된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동안 그린 만화만 2만5000여 컷. 박시백 화백의 ‘〈조조록〉 대장정’은 마무리되었다(출판사 사람들은 이 시리즈를 〈조조록〉이라고 부른다). 잠시 휴식을 가진 후에 ‘텍스트’로 애프터서비스 작업을 할 계획이다.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비전공자가 조선왕조실록에 접근할 수 있는 내비게이션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라는 게 작가의 바람이었는데, 조선왕조실록에 다가가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한 권짜리 ‘조선왕조 연표’를 만들 계획이다. 만화를 보고서 실제 텍스트가 궁금한 이들이 ‘인터넷 조선왕조실록’에서 쉽게 검색할 수 있도록.

여기에 독자 서비스 하나 더. 7월29일부터 휴머니스트 홈페이지 등을 통해 ‘팟캐스트 방송’을 한다. 저술가 남경태씨와 김학원 휴머니스트 대표가 진행하고, 박시백 화백이 고정 출연한다. 매회 역사학자가 함께하기로 했는데, 첫 회에는 신병주 교수가 나온다. ‘〈조조록〉 대장정’의 뒤풀이다.

기자명 차형석 기자 다른기사 보기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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