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치동·반포동 일대에서 3년간 논술 강사를 하면서 논술문을 5000장 정도 첨삭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학년이 올라감에 따라 낱말 수준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작문 실력은 별 차이가 없었다. 아이들은 “착한 사람은 상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라는 권선징악의 사고 틀을 그대로 따라갔다. 교수들이 가장 곤혹스러워하는 대목 중 하나가 학생들에게 리포트 쓰는 법 가르치기라고 하는데 결국 같은 문제다.

필자는 이 문제에 관해 오랫동안 탐색한 끝에 원인이 ‘선택’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한번 차분히 내 아이의 하루를 관찰해보자. 아이가 스스로 선택하는 게 얼마나 될까? 학교에 가는 것, 일어나는 것, 심지어 옷 입는 것까지 아이가 선택하는 게 별로 많지 않다. 이런 생활이 반복되면 결국 ‘삶의 형태’로 굳어지게 된다. 즉, ‘선택하는 삶’ 대신 ‘선택당하는 삶’을 살아간다. 지금 한국에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일본 베스트셀러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이 생각난다. “끊임없는 가치 판단의 축적이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갑니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 그림일 수도 있고 와인일 수도 있고 요리일 수도 있지만, 내 경우는 음악입니다.”
 

ⓒ시사IN 이숙이

아이들의 생활이 이러할진대 책과 학습으로 넘어간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책에는 수많은 단어가 담겨 있는데, 독서를 한다는 말은 이 중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단어와 의미를 ‘선택’하는 것이다. 반면 베스트셀러 중심의 독서 문화는 선택의 여지를 없앤다.

내 아이의 인생을 오토매틱에서 수동 모드로 변화시키는 비법은 ‘아주 사소한 일상’에서 찾아야 한다. 필자의 27개월 아들 민서가 아빠에게 “우유 주세요!” 하면 분홍·연두·파랑 컵을 앞에 놓고 선택하게 한다. 그러고 나서 그 컵을 선택하는 이유를 물어본다. 다섯 살 민준이한테도 “오늘은 엘리베이터로 갈까, 계단으로 갈까?” 하고 물어본다. 민준이는 “오늘은 짐이 많으니까 엘리베이터로 가요”라고 대답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선택의 기회를 마련해주고, 선택의 이유를 물어보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선택 훈련이 된다.

독서 역시 선택을 이용한 책 놀이를 할 수 있다. 아이가 읽는 책을 가지고 언제든지 가능하다. 먼저 아이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맘에 드는 대목이 어디인지 묻는다. 그러고 나서 이유를 묻는다. 부모가 이 질문을 했을 때, 아이가 평범하게 읽던 책이 ‘특별한 책’으로 거듭난다.

조금 더 수준을 높이면 ‘100점 놀이’라는 것을 해볼 수도 있다. 자신이 읽었던 책 중에서 100점부터 0점까지 줄 만한 책들을 꺼내보라고 말하면 아이는 거실 책장에서 신나게 100점 놀이를 한다. 은율(11·가명), 지율(9·가명) 자매는 엄마가 100점 놀이를 제안하자 책을 한껏 들고 와서 어지럽히더니 갑자기 앉아서 정독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이유를 물으니 “이 책이 정말 100점인지 다시 살펴보려고요”라고 대답했다. 만화책을 너무 좋아해서 걱정하게 하던 형주(12세 남아·가명)는 〈공포의 외인구단〉을 100점으로 선택하며 “가장 완성도가 있고 재밌다”라고 했고, 〈마법 천자문〉에는 40점을 주며 “재미는 있지만 정성이 없다”라고 평했다. 아이들에게 선택권을 주면 책 읽는 것부터 시작해 삶 자체가 달라진다.

기자명 오승주 (〈책 놀이 책〉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