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추악해 견디기 힘들면 자연으로 눈을 돌리는 버릇이 생겼다. 신록 예찬을 하면서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차원과는 다르다. 사람들이 끔찍하게 싫어하는 병원균마저도 엄연히 생태계의 한 부분이란 걸 새삼 확인하면 화를 좀 삭일 수 있어서였다. 사람들이 동물의 왕국과 같은 자연 다큐멘터리에 빠지는 데는 그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윤창중 추문이나 검찰의 주진우 기자 영장 청구를 보면서 안식처처럼 찾은 것은 책 두 권이었다. 미국의 저명한 신경정신과 전문의이며 작가이기도 한 올리버 색스가 쓴 〈오악사카 저널〉(알마, 2013)과 강원대 생물학과 명예교수이며 과학 저술가인 권오길 박사의 신간 〈생명 교향곡〉(사이언스북, 2013). 두 책은 현실 세계의 시름을 잊게 할 정도로 충분히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한성원 그림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화성의 인류학자〉라는 책으로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올리버 색스는 뉴욕 식물원 이사이며 미국 양치류협회 정회원이기도 하다. 〈오악사카 저널〉은 어려서부터 양치식물 특유의 화석형 생명력에 매료된 저자의 멕시코 식물 탐사여행기다.

몇 년 전 한 환경단체가 주선한 비무장지대 생태계 탐사여행에 참가한 일이 있다. 그때 안내를 맡은 몇몇 연구자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하찮아 보이는 야생초 한 포기, 총알같이 뒤통수를 스쳐가는 작은 새 한 마리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그들은 기쁨에 겨워 그 하나하나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부르며 그것이 생태계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내게 설명해주려 애썼다.

때 묻지 않은 야생, 아이 같은 호기심

〈오악사카 저널〉에는 바로 그처럼 생명 현상에 대한 반응이 화려한 인물이 잔뜩 등장한다. 미국 양치류연구회의 역사는 189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생명체 가운데 하나인 양치류, 즉 고사리와 사랑에 빠진 아마추어 식물학자 네 명이 설립했다. 전문가가 듬성듬성 섞였지만 지금도 이 연구회 회원 대다수는 의사인 올리버 색스와 같은 아마추어다. 

<오악사카 저널>올리버 색스 지음알마 펴냄
양치류 애호가에게 멕시코의 오악사카는 성지와 같은 곳이다. 오악사카에는 무려 700종에 가까운 양치류가 자생한다. 북미 전체를 뒤져도 400종밖에 찾아낼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기적과 같다. 그래서 양치류 연구자들은 몇 년간 돈을 모아 오악사카를 찾는 게 꿈인데, 〈오악사카 저널〉은 바로 이 여행에서 벌어진 일을 기록했다.

다른 식물이나 동물을 언급할 때는 꼭 ‘외람되다’는 말을 앞세우는 이 마니아들에 따르면 양치류는 식물이 꽃이라는 사치를 부리기 이전의 정숙한 매력을 지닌 존재다. 이 책을 펼치면 뛰어난 인문적 소양과 과학지식을 바탕으로 이 괴짜들의 말과 열정을 상세히 해설하는 올리버 색스의 솜씨 덕분에 양치류의 신비한 세계를 만끽할 수 있다. 더불어 스페인 침략자가 망가뜨린 문명과 생태계, 그리고 초콜릿과 토마토, 담배에 얽힌 온갖 진기한 얘기를 들을 수 있다. 

〈생명 교향곡〉을 쓴 권오길 박사야말로 어떻게 소개하더라도 ‘외람되다’는 기분이 들게 만드는 분이다. 어떤 수사도 후학에게 과학을 공부하는 즐거움을 나눠주려는 그의 열정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한평생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을 잃지 않고 숲과 흙, 곤충과 새를 관찰해왔다. 그의 눈을 통해 보면 우리 주변에 널린 흔한 생명체마저 갑자기 진기하게 변한다. 

이 책은 이를테면 노학자의 사계절 관찰 일기다. 비목에 수액이 흐르고 석불에도 피가 흐른다는 봄은 한없이 아름다워 보이지만 풀과 동물이 죽기 살기로 으르렁대는 전쟁터다. 식물이 뿌리나 잎줄기에서 화학물질을 분비해 다른 식물의 생장이나 발생을 한사코 방해하는 알렐로파시(allelo pathy), 우리말로는 타감작용에 발동을 거는 시기다. 특히 사납기로 소문난 소나무는 갈로타닌이라는 타감물질을 분비해 그 밑에서는 제 새끼마저도 자라지 못하게 만든다. 나방 애벌레인 송충이, 배추흰나비 유충이 달려들면 숲과 들판에는 난리가 난다. 소나무와 배추는 휘발성 화학물질을 훅훅 뿜어낸다. 그러면 이 냄새를 맡은 말벌들이 득달같이 달려온다. 공격과 방어가 빈틈없이 이루어지는 자연은 신비롭다.

<생명 교향곡>권오길 지음사이언스북 펴냄
근본이 부실하면 변칙을 쓸밖에

여름 바닷가.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어주기 편리하게도 조개껍데기에는 구멍이 뚫려 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 하나하나의 구멍은 처참한 살육 현장이다. 죽으면 집게가 뒤집어쓰고 다니는 집이 되는 구슬우렁이가 저지른 짓이다. 이놈들은 슬금슬금 조개에 다가가 억세게 틀어쥔다. 그다음에는 야문 치설로 껍데기를 갉아 구멍을 낸다. 전기 드릴이 따로 없다. 침샘에 모아놓은 독을 구멍에 쏟아 부으면 상황 끝이다.

만산홍엽. 가을에 사람들은 철학자가 되어 인생무상이니 뭐니 하지만 낙엽은 일종의 배설이다. 식물은 사람의 콩팥 같은 배설기가 없어서 세포 속 액포라는 작은 주머니에 노폐물을 담아놓았다가 갈잎에 넣어 내다버린다. 그렇다고 동물의 똥통 같은 취급을 하며 인상을 쓸 것은 없다. 액포에는 물과 함께 안토시아닌 색소, 당류, 유기산, 단백질, 효소와 숱한 무기물질이 들었다. 낙엽은 배설물인 동시에 다시 흡수하는 양분이기도 하고 추운 겨울을 견디기 위한 이부자리이기도 하다. 나무가 낙엽을 떨구지 않으면 한겨울에 발치의 물이 얼어 수관으로 물을 빨아올리지 못해 말라죽기 십상이다.

발치에 낙엽을 덮는다 해도 그 매서운 겨울을 나무는 어떻게 견딜까. 땅 위에 우뚝 솟은 소나무 줄기와 솔잎을 모조리 잘라 더한 무게와 땅속 뿌리의 무게는 거의 맞먹는다고 한다. 커다란 아카시 나무는 500m까지 뿌리를 뻗는다. 14주가 된 옥수수 뿌리는 6m에 달한다. 다 자란 호밀 한 그루의 뿌리를 모두 이으면 무려 623㎞나 된다. 든든한 뿌리가 식물이 겨울을 견디게 하는 힘이다.

권오길 박사에 따르면 자연은 결코 평화로운 낙원이 아니다. 생존과 번식을 위한 치열한 투쟁이 벌어지고 때로는 비열한 술수가 난무하는 곳이기도 하다. 극락조 수컷 중에는 이름값을 못하고 번개같이 암컷을 꿰차고 도망칠 기회를 잡으려 먼산바라기 흉내를 내는 놈도 있다. 큰입우럭 무리의 일종인 블루선길피시는 성 의태 행위도 마다하지 않는다. 정면 승부를 할 자신이 없는 수컷은 아예 자기 몸뚱이를 줄여 암놈인 체하다가 은근슬쩍 제 유전자를 뿌리는 얌체 짓을 한다. 뿌리를 든든하게 내리지 못하는 식물은 겨우살이 같은 기생체가 된다. 그러고 보면 권력 눈치 살피기 바쁜 검찰이나 윤창중씨의 ‘창조적인 행태’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근본이 부실하면 변칙을 쓸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자연과 생명에 관한 책을 읽으면 분명 거리를 두고 인간 사회를 바라볼 힘이 생긴다. 참기 힘든 추태에 연민의 눈길을 보낼 여유를 가질  수 있다. 물론 반드시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이 두 책은 머리맡에 모시고 두고두고 읽어볼 가치가 있다.

기자명 문정우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