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에 제정된 클라이스트 상과 1923년에 생긴 뷔히너 상은 독일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권위 있는 문학상이다. 두 상은 각기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1777~ 1811)와 게오르그 뷔히너(1813~1837)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두 사람의 이름 뒤에 붙은 괄호 속 숫자를 세어보면 그들은 고작 34년과 24년을 살았다. 그런데도 독일문학사를 장식하는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올랐으니 작가의 미덕은 고령이 되도록 마냥 펜을 쥐고 버티는 데 있지 않다. 인생은 마라톤일 수 있을지언정 문학은 결코 완주에 박수가 쏟아지는 마라톤이 아니다. 작가는 점차 희미하게 사라지기보다 한순간에 타버리는 게 낫다. ‘창비세계문학’ 선집의 일환으로 클라이스트의 중·단편을 망라한 〈미하엘 콜하스〉(창비, 2013)가 나왔다. 소설가보다는 극작가로서의 명망이 더 중시되었던지 클라이스트의 희곡은 거의 번역되어 있으나, 그의 소설은 여러 출판사들이 경쟁적으로 쏟아내고 있는 세계문학 선집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문고본으로 나온 같은 제목의 〈미하엘 콜하스(외)〉(서문당, 1999)가 없지 않으나, 세계문학 선집에 드는 것에는 정전에의 진입 내지 승인이라는 새삼스러운 의미가 있다. 이 작품집의 최고작은 단연 표제작과 〈O. 후작 부인〉이겠지만, 내가 꼽는 작품은 1647년 5월13일, 칠레에서 발생한 대지진을 배경으로 삼은 〈칠레의 지진〉이다.
산티아고의 귀족인 돈 아스테론은 자신의 딸 호세파가 신분 낮은 가정교사 헤로니모와 사귀자 딸을 수녀원에 격리시킨다. 그런다고 헤어질 청춘남녀가 아니다. 두 사람은 수녀원에서 밀회를 계속하다가 급기야는 아이를 낳게 된다. 성스러운 수녀원에서 사생아가 생긴 데 분개한 산티아고 총독과 시민은 두 사람에게 극형을 선고했는데, 사형 집행일에 일어난 지진으로 두 사람은 감옥과 처형장에서 놓여나 목숨을 구하게 된다. 기적처럼 재회한 헤로니모와 호세파는 무너진 수녀원에서 그들의 아이를 찾게 되고, 참사를 모면한 피난민이 모여 있는 숲의 주민이 된다. 온갖 수목이 우거지고 향기로운 열매가 탐스러운 이 숲이 ‘에덴동산’의 은유라는 것을 굳이 말해야 할까? 신분에 관계없이 서로 나누는 사람들 “인간이 가진 이 세상의 온 재물이 땅으로 가라앉고 온 자연이 흙더미에 묻히는 듯한 이 소름 끼치는 순간에, 인간 정신만은 아름다운 꽃처럼 피어오르는 듯싶었다. 눈앞에 펼쳐진 들에는 사람들이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한데 누워 있었다. 영주든 거지든, 귀부인이든 시골 아낙이든, 공무원이든 삯일꾼이든, 수사든 수녀든 서로 동정하고, 서로 도와주고, 연명하려 아껴뒀던 음식을 기꺼이 함께 나눴다. 재난을 다 함께 겪다보니
살아남은 사람들 모두가 한 가족이 된 것 같았다.” 작중의 호세파는 재난을 함께 겪은 사람들이 숲 속에 만든 공동체를 ‘천국’ 또는 하늘이 내린 ‘은총’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소설이기 때문에 가능한 공상이 아니다. 레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펜타그램, 2012)는 공동체에 닥친 재난, 예컨대 지진이나 허리케인 같은 자연재해,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과 시카고 대화재 같은 대형 사고, 그리고 현대전의 특징인 무차별 공습과 2001년 뉴욕 세계무역센터에 가해진 9·11 테러와 같은 재난이 어떻게 공동체의 복(福)으로 전화되는지를 밝혔다. 자신의 존재 이유가 필요한 지배 엘리트는 재난 현장이 폭력·약탈·무질서로 얼룩지기를 내심 바라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게 지은이의 일관된 주장이다. 1906년 4월18일,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때는 가족을 잃고 집을 잃은 10만명 이상이 몇 주나 야영을 하며 버텼다. 아래는 그때 나온 신문 기사의 한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