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8월7일 아침, 한 남자가 뉴욕 맨해튼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 꼭대기에 올랐다. 지금은 무너지고 없는 쌍둥이 빌딩의 건물과 건물 사이, 모서리와 모서리 사이에 걸린 외줄 위로 왔다갔다 해맑게 웃으며 45분 동안 머물렀다.

바로 그 남자, 곡예사 필리페 페티의 무모하고 경이로운 모험은 35년 뒤 다큐멘터리 〈맨 온 와이어〉에서 아주 흥미진진하게 재구성되었다. 다큐이면서 극영화 못지않은 스릴과 반전까지 갖춘 덕분에 2009년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받은 이 작품을 〈시사IN〉 제125호에 소개하면서 나는 이렇게 썼다. “현기증이 날 만큼 아찔하고 코끝이 찡하도록 아름답다.” 이런 말도 덧붙였다. “이렇게 멋진 다큐멘터리를 다시 만나려면 적어도 10년은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다행히 10년이나 기다리는 일 따위 일어나지 않았다. 3년이면 충분했다. 〈맨 온 와이어〉의 제임스 마시 감독이 선보인 새 작품 〈섀도우 댄서〉. 찡하고 짠하다. 애틋하고 아름답다. 단, 이번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극영화다.

1973년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북아일랜드 완전 독립을 주장하는 IRA(아일랜드 공화국군)가 영국군과 대치하며 격렬하게 저항하던 그때, 어린 콜레트(앤드리아 리즈브로프)의 더 어린 남동생이 집 밖에 나갔다가 총에 맞아 죽는다. 격동의 시대가 남긴 흔한 비극. 그로부터 20년이 흘렀다.


1993년 영국 런던. 지하철 폭탄 테러를 감행하려다 실패한 한 여성이 영국 정보부 MI5에 끌려온다. 콜레트. 격동의 시대가 키운 수많은 투사 가운데 한 사람. 지난 20년 사이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싱글맘의 삶을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에 부치지만, 먼저 떠나보낸 동생의 복수를 위해 기어이 테러리스트가 되기로 결심한 터였다.

MI5 요원 맥(클라이브 오웬)이 콜레트의 약점을 파고든다. 사랑하는 아들을 다시 보고 싶으면 협조하라고, 특히 IRA 핵심 멤버로 활동 중인 다른 형제들의 정보를 넘기라고 몰아세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테러리스트가 되기도 전에 스파이가 먼저 되어버린 콜레트. 사랑하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 사랑하는 오빠와 동생을 배신해야 하는 처지. 격동의 시대가 떠안긴 이 잔인한 딜레마 위로 휘청휘청, 콜레트의 위태로운 줄타기가 시작된다.

이 세계가 외줄 위를 걷고 있으니

왜 이 영화를 봐야 하느냐고 묻는 이들에겐 이렇게 답해주겠다. 이미 수많은 영화에서 북아일랜드 독립투쟁을 다루었지만, 다큐멘터리를 극영화처럼, 극영화를 다큐처럼 만드는 특별한 재능의 소유자 제임스 마시 감독이 들려주는 IRA 이야기는 처음이니까. 이미 수많은 배우들이 테러리스트를 연기했지만, 대단한 존재감의 젊은 영국 배우 앤드리아 리즈브로프가 연기하는 테러리스트는 처음이니까. 특히 부서질 듯 연약해서 말없이 꼭 안아주고 싶을 만큼 안쓰러운 주인공 콜레트. 새빨간 트렌치코트 깃을 세우고 매서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걷는 그녀의 위태로운 뒷모습만으로도 그 시대를 살던 모든 이들의 위태로운 운명을 충분히 짐작하게 만든 영화니까.

이야기의 긴장과 감동은 억지로 ‘짜내는’ 것보다 서서히 ‘배어나온’ 것일수록 그 여운이 깊고 길다는 사실을 새삼 증명하는 영화 〈섀도우 댄서〉를 보고 난 후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맨 온 와이어〉의 곡예사 필리페 페티는 45분 만에 웃으며 줄에서 내려왔지만, 어쩌면 콜레트는, 그들의 역사는, 우리 모두는, 그리고 이 세계는 여전히 삶과 죽음 사이, 개인과 조직 사이, 인간의 모서리와 또 다른 인간의 모서리 사이에 걸린 위태로운 외줄 위를 휘청이며 걷는 건 아닐까, 하는….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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