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권 말기에서 이명박 정권 초인 2007년 말~2008년 초, 북한 핵문제를 극적으로 해결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7년의 2·13 합의와 10·3 합의, 그리고 10·4 남북 정상회담에 고무돼 있었다. 일련의 합의대로 북한의 비핵화 과정에 보상이 주어지고 한국과 미국을 신뢰할 수 있다면 북한도 단계적으로 핵을 포기해 나가겠다는 방침을 주위에 거듭 밝혔다고 한다.

김 위원장이 이 같은 결심을 하게 된 데는  2006년 1월 후진타오 주석의 제안에 따라 중국 남부까지 순방을 다녀왔지만 그 뒤 중국과의 관계가 몇 번의 계기로 크게 악화된 면이 작용했다고 한다. 중국을 믿고 북·중 밀월관계에 북한의 운명을 맡기려 했으나 중국은 역시 못 믿을 나라라는 배신감만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이 중국에 사전 통보도 없이 2006년 7월 미사일을 발사하고 10월에 핵실험까지 감행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당시 김 위원장에게 남은 선택지는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에서 활로를 여는 것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2007년 있었던 일련의 비핵화 합의의 배경이었다.
 

당시 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를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가 있다. 한·미 양측이 북한의 의지를 시험하기 위해 영변의 냉각탑 폭파, 북한이 보유한 미사용 핵연료봉 약 4000~6000개의 폐기 또는 대남 판매, 그리고 고농축 우라늄(HEU) 제조용 원심분리기 제작에 필요한 알루미늄 샘플의 인도 등을 타진하자, 놀랍게도 세 번째만 빼고 앞의 두 가지 사항을 수락한 것이다. 고농축 우라늄은 북한이 그동안 존재 자체를 인정한 적이 없기 때문에 협상이 쉽지 않은 사안이었다. 따라서 냉각탑을 폭파하고 미사용 연료봉을 넘겨받는 식의 비핵화를 밟아가면서 단계적으로 추진할 사안이었다.

MB 정권 등장 이후 비핵화 유훈 사라져

북한은 약속을 지켰다. 냉각탑은 2008년 6월27일 폭파됐다. 그런데 두 번째 항목인 미사용 핵연료봉 구매는 불발로 그쳤다. 2007년 대선으로 집권한 이명박 정권이 국제 시세보다 두 배라는 이유로 구매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 연료봉에는 재처리할 경우 핵무기 1~2개를 만들 정도의 플루토늄이 들어 있었고, 국내로 들여와 발전용으로 사용하는 것도 가능했다.

국제 시세의 두 배라고 해봐야 수백억원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것 때문에 구매를 포기한다는 것은 사실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돈 문제 이전에 처음부터 대북정책을 강경 기조로 끌고 가려 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왔다(〈시사IN〉 제170호 ‘북한 핵무기의 불편한 진실’ 참조).

한·미 양국이 북한과의 협상을 조금 일찍 시작했거나 아니면 2008년 2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지 않았다면 2월12일의 북핵 실험으로 실체가 드러난 ‘놀라운’ 수준의 북한 핵무장 때문에 옴짝달싹 못하게 된 오늘의 악몽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결정적인 전환점에 이명박 정권이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처음부터 강압적 태도로 일관한 이명박 정권의 대북 정책으로 인해 미사용 연료봉의 인수뿐 아니라 2007년의 2·13, 10·3 합의 등 그간의 모든 평화적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북핵 문제의 차원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먼저 북한 당국의 입에서 ‘조선반도의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다’라는 말이 사라졌다. 즉 이명박 정권 이전에 북한 핵문제는 북한이 이를 통해 평화협정이나 북·미 수교 등 체제 안전과 경제 지원을 끌어내기 위한 협상용 카드의 성격이 강했다. 그러던 것이 북한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핵보유 및 핵무장 쪽으로 무게중심이 옮아갔다. 북한이 이명박 정권의 안보 위협을 빌미로 중국을 설득해 중국이 더 이상 북한에 비핵화 압력을 넣지 않게 되면서, 북한의 핵무장은 가속페달을 밟을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는 이명박 정부의 적대정책에 맞서 북한이 남한을 핵공격 대상에 포함시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 전에만 해도 북한은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때문에 핵을 개발한다면서 남한, 즉 동족의 가슴에는 절대로 핵을 겨누지 않는다고 공언해왔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 등장 이후 남북 관계가 적대적 관계로 전환하면서 핵탄두 장착이 가능한 노동미사일의 사거리를 줄여 남한을 타격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대남 핵위협을 노골화하기 시작했다. 2010년 연평도 사태 발발 직전에는 방북자들을 대상으로 북한군이 백령도나 연평도를 기습 점거한 후 남쪽이 반격하려 하면 핵을 앞세워 제압하겠다는 시나리오를 공공연히 흘리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더욱 결정적인 전환은 북한 핵의 성능이다. 이명박 정권 이전만 해도 북한 핵의 주력은 플루토늄 핵이었다. 사실 이 플루토늄 핵의 대부분은 부시 정권 시절인 2003년 이후 만들어진 것이다.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국무부 차관보의 방북으로 2차 핵 위기가 조성된 직후 부시가 일방적으로 경수로와 중유 공급을 중단하며 제네바 합의를 깨버리자 북한도 2003년 초부터 영변 5메가와트 원자로를 가동해 플루토늄 추출에 나섰다. 바로 그 이후 추출된 플루토늄이 약 36kg으로 그 이전에 추출된 약 10kg의 서너 배에 이른다. 따라서 미국의 핵 전문가들은 북한의 플루토늄 핵을 ‘부시의 핵’이라고 부른다.

문제는 이명박 정권 등장 후 플루토늄 핵보다 훨씬 위험한 고농축 우라늄 핵개발이 본격화됐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일부 언론에서는 현재와 같은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핵개발이 2005년부터 시작됐다고 추정하지만 이는 책임 소재를 분산하기 위한 억지 주장으로 보인다. 이명박 정권 이전까지 한국과 미국의 정보기관은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시설에 대해 ‘파키스탄의 칸 박사 팀으로부터 입수한 P1 타입의 원심분리기 기술과 설계도, 그리고 원심분리기 13개와 핵심 부품 일부’를 확보한 수준으로 봤다. 참고로 P1 타입 원심분리기는 현재 이란이 보유한 것으로 삼성경제연구소 임수호 박사에 따르면, 이 방식은 아무리 가동해도 우라늄 농축이 불가능한 빈 깡통일 뿐이다. 다시 말해 이명박 정권 이전 북한의 우라늄 농축 수준은 사실상 별 볼일 없는 것이었다.

그러던 북한이 2010년 11월 미국의 핵물리학자인 지그프리드 헤커 박사를 초청해 영변의 현대적 고농축 우라늄 시설을 보여줬다. 당시 헤커 박사는 자신의 눈앞에 P2 타입의 최신형 원심분리기 1000여 기가 놓여 있는 것을 목격했고, 북한 관계자로부터 같은 시설 내에 2000기가 존재한다는 설명을 들었다고 말했다. 또한 또 다른 핵시설 등을 감안할 때 다른 곳에도 원심분리기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외부에 보여주는 핵시설은 협상용이기 때문에 최소한 다른 곳에 같은 시설을 은닉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상식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말만 요란했지 유치한 수준의 고농축 시설을 갖고 있던 북한이 어떻게 해서 몇 년 사이에 이처럼 환골탈태할 수 있었을까? 당시 〈시사IN〉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이명박 정권 등장 이후 한·미 양측의 잇따른 ‘배신’으로 충격을 받은 김정일 위원장이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난 이후 북한은 핵무기 개발에 매달렸고, 그 결과가 바로 독자적인 핵무장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김정일 위원장의 뇌졸중 사건은 북한 엘리트층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고 알려졌다. 이들은 자신들이 살길은 체제를 중심으로 똘똘 뭉치는 길밖에 없다고 봤고, 체제 수호를 위한 핵심 역량을 고농축 우라늄 핵개발에 집중했다는 것이다. 그 즈음 북한의 전 국방비가 고농축 우라늄 기술 확보에 투입됐다고 할 정도로 여기에 기울인 노력은 처절한 것으로 알려진다.  파키스탄 칸 박사 팀의 기술자들과 옛 소련 과학자, 그리고 중국을 통한 핵심 부품 수입 등 모든 노력이 동원되었다는 후문이다.

2009년 6월 우라늄 농축 선언

북한은 김정일 위원장이 깨어난 이후인 2009년 4월 로켓을 발사하고, 5월에는 2차 핵실험(플루토늄 핵)으로 미국의 태도 변화를 압박했다. 하지만 2009년 6월13일(현지 시각 6월12일) 유엔 안보리가 대북 제재 결의 1874호로 화답하자 북한 외무성은 “새로 추출한 플루토늄 전량을 무기화할 뿐 아니라 우라늄 농축에도 착수한다”라고 발표했다. 당시로서는 유엔제재 결의가 워낙 크게 부각되었기 때문에 북한 외무성의 이 성명은 제대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2009년 6월13일 북한의 우라늄 농축 선언이야말로 이번 제3차 핵실험에서 드러난 북한의 가공할 핵능력의 출발점이었던 셈이다. 그런 면에서 현재 문제가 되는 고농축 우라늄을 ‘이명박의 핵’이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 실제로 전문가들 중에는 2008년 초의 호기를 놓치지만 않았어도 평화협정 체결과 북한의 플루토늄 핵 동결 및 폐기 등을 통해 북핵 문제 해결의 단초를 열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도 못 막을 상황이 됐다며 한탄하는 이들이 많다.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능력이 이처럼 진전된 상태에서 과거처럼 평화협정 수준에 만족할 리도 없고, 어쩌면 주한미군 철수 및 한·미 동맹 해체까지 요구하고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이 안보를 말아먹었다’는 분노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만큼 이번 제3차 핵실험의 충격은 크다. 과거 1, 2차 실험 수준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더욱 두려운 것은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북한이 과연 무엇까지 가졌는지 그 누구도 장담을 못한다. 우선 지금까지 드러난 결과만 놓고 판단해보자.
 

일단 핵 폭발력과 관련해 우리 국방부가 발표한 6~7kt이라는 주장은 국제적으로도 ‘정치적 판단’이라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대개 이런 일이 있으면 안보 부서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상황을 좀 더 과장해 발표하곤 하는데, 우리 국방부는 오히려 지나치게 축소 지향이다. 특히 국방부가 근거로 내세운 지진파 수치 자체가 중간에 왜곡되면서 신뢰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기상청이 애초에 발표한 핵폭발에 따른 지진파 크기는 5.1이었다. 그런데 미국 지질연구소가 최초 4.9에서 5.0으로, 다시 5.1로 바꿨는데도 우리 기상청은 오히려 미국이 틀렸다고 수정한 애초의 지진파 계측 수치인 4.9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를 토대로 한 핵폭발 위력의 추산도 국제적으로 가장 보수적이기 때문에 잘 사용하지 않는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기구(CTBTO) 기준으로 추정해 6~7kt(히로시마 원폭의 절반 수준)이라 발표했는데, 이조차도 여러 곳의 지진파 계측이 다를 경우 평균치로 계산하는 관례를 무시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즉 우리와 중국이 4.9인 데 비해 미국이 5.1, 독일과 일본이 5.2로 봤다면, 5.2로 발표한 일본과 독일의 지진파에 의한 폭발력 20kt과 6~7kt의 평균치인 14~15kt이 이번 3차 실험의 폭발력이다.  가장 보수적인 CTBTO 기준으로 해도 일반적으로 핵실험 성공의 기준으로 평가하는 히로시마급(13~15kt) 위력을 보인 것이다.

증폭핵분열 기술 성공 가능성 있어

이처럼 보수적인 평가 기준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더 많이 통용되는 기준으로 계산하면 이보다 몇 배로 늘어난다. 독일 주간지 〈슈피겔〉이 보도한 독일 정부 산하 연방지질자원(BER)연구소의 추산(40kt의 폭발력)이 그것이다. 또 2월13일자 〈내일신문〉 보도에 따르면 기상청의 한 관계자는 “진도 4.9면 20kt, 진도 규모가 0.2 상승한 5.1이면 50kt까지 상승한다”라고 말해 학계 추산으로도 이번 3차 핵실험의 폭발력은 훨씬 더 커질 수 있다. 40~50kt이면 히로시마급 원폭의 3배 가까이 되는 위력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슈피겔〉 보도에 따르면 이번 북한 핵실험은 ‘고농축 우라늄을 저출력으로 사용(즉 우라늄의 양을 적게 사용)해  이 같은 폭발력을 얻었다는 점에서 선진국 수준’이라고 지적한 대목이 나온다. 국내외 일부에서 지적한 대로 이번 북한 핵실험이 핵물질을 적게 사용하고도 폭발력을 증폭한 증폭분열탄 실험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증폭분열탄이란 기존 핵분열 과정에 중수소와 3중수소를 융합해 핵분열을 증폭시킨 것으로 2010년 5월 북한이 핵융합에 성공했다고 발표한 이래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이런 맥락에서 2월12일 나온 조선중앙통신 보도를 다시 보면 이를 암시한 대목들이 눈에 띈다. 먼저 이번 핵실험이 ‘다종화된 핵 억제력의 우수성을 보여줬다’고 함으로써 이번에 실험한 것이 플루토늄탄이 아니라 우라늄탄이라는 점을 암시했고, ‘이전과 달리 폭발력이 크면서도 소형화·경량화된 원자탄을 사용하여 높은 수준에서 실험을 했다’고 밝힘으로써 증폭핵분열 기술을 사용했을 가능성을 드러낸 것이다.

이를 토대로 보면 북한의 핵능력은 이미 과거 1, 2차 실험 단계와 비교할 바가 아니다. 2009년 이래 비약적인 발전을 했고 이제는 거의 통제 불능 상황까지 온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고 있다(19쪽 상자 기사 참조).

그렇다면 이번 핵실험을 둘러싼 국제적인 이해관계는 어떻게 형성되고, 국제사회는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이명박 대통령과 함께 오바마 미국 대통령 역시 현재의 북핵 사태를 초래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미국의 선임 외교관인 앨런 롬버그 씨를 비롯해 미국 안에서도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문제를 방치하면 안 된다고 주장해온 인사가 많았으나 오바마 대통령은 ‘전략적 인내’라는 정책 뒤에 숨어서 나오지 않았고, 이명박 정권이 사태를 악화시키는 걸 방치했다.

그런데 이번 북한의 핵실험은 재선에 성공해 비로소 한반도 문제에 대한 개입 루트를 찾고 있던 오바마에게 매우 중요한 초대장 구실을 할 가능성이 높다. 이해득실만으로 볼 때 오바마와 일본의 아베에게는 이번 상황이 결코 나쁠 게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꽃놀이패라는 지적도 나온다. 반대로 가장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인 쪽은 중국의 시진핑 총서기이고, 그다음이 한국의 박근혜 당선자다.

곤혹스러운 시진핑과 박근혜

일본의 경우는 이번 북한 핵실험이 아베 신조 총리가 추진해온 평화헌법 개정의 호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좋아 보인다. 그런데 오바마의 경우는? 지난해 일본이 센카쿠 매입 문제를 야기해 중국과의 대립전선을 만들어 왔던 그 모든 과정의 실질적인 설계자가 미국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심을 깔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난해 초 오바마의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가 바로 그 시작이다. 2008년 금융위기 상황을 극복하지 못한 미국 경제를 살리려면 군산복합체의 무기 시장을 활성화하는 수밖에 없는데 종전의 이라크나 아프간은 첨단 무기 시장으로서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아시아의 패권국으로 발돋움하려는 중국을 견제할 겸 대중국 포위망을 결성함으로써 첨단 무기 시장을 확대하겠다는 게 바로 오바마의 ‘아시아로의 회귀’ 이면이다. 지난해 센카쿠 문제를 계기로 중국 공산당 18차 당대회에서 군산복합체 대표인 쩡칭훙 전 상무위원이 배후에 있는 강경 시진핑 체제가 형성된 데 이어 그 반대편인 일본에 역시 강성인 아베 내각이 등장함으로써 미국은 일단 동북아시아 무기 시장의 판을 키우는 데 성공했다.

마지막 남은 변수가 지난해 12월 한국 대선에서 누가 되느냐였다.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고 그의 외교안보 공약에 들어 있는 ‘북한 핵 미사일의 무력화를 위한 억지력 강화 노선’대로만 간다면 미국으로선 안심이었다(〈시사IN〉 제270호 ‘박근혜, MB 군비확대 정책 승계한다?’). 그런데 박근혜 후보의 당선 이후 행보가 미국을 적잖이 당황케 했다. 중국에 먼저 특사를 보내고, 미국산 헬기인 시누크 대신 영국산 헬기를 구입하고, 미 국방부가 미는 F35 대신 F-15EA로 바꾸려 시도하는 등 ‘친중비미(親中 非美)’가 아니냐는 의구심을 살만한 행보가 이어졌다. 올 들어 미국 측 인사들의 서울 방문이 잦아지고, 미국에 정책협의대표단으로 간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오바마를 만나지 못하는 일 역시 예사롭지 않게 여겨졌다.

여기에 시진핑 총서기의 국가주석 취임을 앞둔 중국의 행보 역시 심상치 않았다. 특히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서 여차하면 일본과 일전을 불사하려는 태도가 역력했다. 베이징에서는 이를 ‘시진핑의 첫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국은 이런 이유로 핵실험에 나서려는 북한을 결사적으로 막아섰다. 1월 말과 2월 초 북한이 2006년 핵실험 때와 같이 당·정·군의 모든 채널을 닫아걸고 중국의 대화 요구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나중에는 센카쿠 문제까지 거론하며 양해를 구했다는 얘기도 있다.

판이 이렇게 돌아가던 터라 지난 1월22일의 유엔 안보리 결의를 둘러싸고도 말이 많았다. 지난해 12월12일 발사된 은하3호 로켓에 대한 제재를 한 달이나 있다가 강도 높게 함으로써 북한이 핵실험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게 유도한 것 아니냐는 의심이다. 이를 두고 “미국은 북한에게 핵실험에 나서라며 제재를 했고, 중국은 핵실험을 하자 말라는 뜻으로 제재를 했다”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온다.

이런 구도에서 터진 북한 핵실험은 오바마에게는 여러 모로 호재다. 중국 시진핑이 센카쿠에만 집중하지 못하도록 전선을 분산했고, 한국 박근혜 당선자가 대북 독자행보를 하는 데 제동이 걸렸다. 북핵 갈등이 고조되면 미국이 본격적으로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의 대북 정책을 한·미·일 구조 속에 편입시키려는 압박이 거세질 가능성이 높다. 북한 핵실험 다음 날 조·중·동이 쏟아낸 대동소이한 처방이 바로 그것이다. 심지어 지난해 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기획관이 몰래 추진하려다 문제가 된 한·일 간 군사 교류를 재추진하라는 목소리까지 등장했다. ‘아시아 복귀’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오바마의 ‘한반도 복귀’인 셈이다.

오바마가 마냥 웃을 수 있을까

하지만 오바마가 마냥 웃을 수만 있을까. 북핵 문제로 조성된 현 국면을, 아베 총리가 몰아붙이는 엔저에 비교해 보면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엔저 역시 아시아 경제 주도권을 중국으로부터 일본으로 어느 정도 옮기려는 미국의 기획이라는 지적이 있고, 직격탄을 한국이 맞게 되면서 역시 박근혜 길들이기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그러나 정부 부채가 GDP 대비 230%에 육박하는 일본 정부에게 엔저는 단기 카드일 뿐 중장기로 가면 독배다.

북핵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이미 핵 능력을 입증한 북한은 미국의 태도를 봐가면서 단계적으로 압박의 수위를 높이겠다는 심산이다. 3월까지 지켜보고 별다른 움직임이 없으면 우라늄 농축 능력을 실제로 보여줌으로써 미국의 국제적 리더십에 타격을 가할 계획이라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엔저와 마찬가지로 단기 승부일 뿐 오래 끌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의 한반도 개입 프로세스가 본격화하면 제2의 제네바 모델이 가동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1994년 6월 전쟁 위기로까지 치닫던 한반도의 북핵 위기가 제네바에서의 극적 타결로 방향을 선회하기까지 약 4개월이 걸렸다.

기자명 남문희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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