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계기판이 150㎞/h까지 치솟았다” 정도로 기사의 리드(첫 문장)를 구상했다. ‘사생택시’의 악명을 들어온 터라 타자마자 계기판만 뚫어져라 볼 심산이었다. 때는 2012년 봄, 가수 JYJ의 ‘사생팬’ 폭행 논란이 일면서 사생팬 자체가 뭇사람의 관심 대상이 되어 취재에 나섰다.

좋아하는 연예인의 사생활을 뒤쫓는 사생팬에게 사생택시는 돈을 받고 활동을 도와주는 유용한 존재였지만, 해당 연예인에게는 괴로운 존재였다. 사생택시에 타고 실태를 파악할 요량이었다. 물어물어 사생택시 전문 업체(직원은 사장 포함해 3명이었다)를 섭외했으니 취재가 쉽게 풀린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그런데 이게 웬걸. 사생택시가 지각을 했다. 당연히 계기판을 묘사할 리드는 무산. 우선 빨리 쫓아가달라고 했다. 서울 등촌동 SBS에 도착했으나, 이미 그 그룹은 방송국 안으로 들어갔다. 당연히 내가 만나고 싶은 사생팬도 눈에 띄게 적었다.


방송사 문 앞을 서성이는데, 같은 처지의 10대 팬으로 추정되는 한 소녀가 말을 걸어왔다. “누구 팬이세요?” 기자라고 밝히고 사생팬 취재를 하려다 이미 실패한 경험이 있어 망설였다. “○○이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 그룹 멤버 중에서는 수더분한 이미지를 가진 그가 제일 귀엽다고 느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그럴 줄 알았어요!!!”였다.

위기를 잘 넘긴 건 맞는데 어째 기분이 찜찜했다. 운동화에 잠바를 입은 취재 복장이라 자격지심이었을까. ‘왜 내가 그 그룹에서 제일 패셔너블하거나 잘생긴 멤버 팬이라면 안 어울리나?’ 괜스레 억울했다. 그래도 덕분에 도란도란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생팬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헤어질 때 잠시 고민했다. 기자라고 밝힐 것인가. 결국 끝까지 나는 ○○팬으로 자리를 떴다. 소녀에게 미안했지만, 그게 서로에게 좋을 거라 믿었다. 대신 그녀의 이야기는 기사에 직접 멘트로는 쓰지 않았다.

취재를 하다보면 본의 아니게 기자임을 숨길 때가 있다. 고위공직자의 부동산 투기 현황을 알아보기 위해 부동산에 전화 걸어 복부인인 척,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저를 스케치하기 위해 주민인 척한다. ‘척’과 ‘거짓말’ 사이를 묘하게 줄타기해야 하는 기자의 취재는 어디까지 허용될까. 물론 기준은 공익이라 여긴다. 그렇지만 또 생각한다. 괴물과 싸우더라도 적어도 괴물은 되지 말아야 한다고. 쉽게 풀릴 거 같지 않은 이 고민을 할 때면 이따금 그 사생팬 소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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