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은씨(가명·26)는 1986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영화 속 심미진(한혜진)처럼 5·18을 직접 겪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5·18 후유증을 어려서부터 앓았다. 아버지 때문이다. 아버지 이봉삼씨(가명·50)는 1980년 5·18 당시 열여덟 어린 나이였지만 총을 들었다. 이씨뿐 아니라 열혈 고등학생들이 그때는 시민군에 합류했다. 일찍 생계에 뛰어든 아버지는 5월19일 11공수부대가 진압에 나서자 거리로 나섰다. 5월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가 있던 날 버스에 올라탔다. 무기고를 털었다. 같은 날, 도청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건물 옥상에서 떨어졌다. 일찍 전남대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그는 붙잡혔다. 동네마다 벌어진 폭도 색출 작업이었다. 머리를 숙이고 끌려가는 그의 윗옷 뒤에는 ‘폭도’라는 글씨가 쓰였다. 상무대로 끌려간 아버지는 고문을 당했다. 고문 과정에서 머리를 맞지 않으려고 두 팔로 감쌌다. 그러자 손목이 부러졌다.
 


보이지 않는 상처는 깊었고 더 오래갔다. 지금이야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받았지만, 5·18 참가자는 폭도로 낙인찍혔다. 이봉삼씨도 ‘폭도’ 신분을 감추고 1984년 주은심씨(가명)와 결혼했다. 순탄한 신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영화 〈26년〉에도 나오듯, 평화는 사소한 일로 깨졌다. 사이렌 소리나 천둥소리가 끔찍한 악몽을 다시 끄집어냈다. 천둥이 치자 이씨는 아내를 깨워 장롱에 밀어넣었다. “가만히 있으란 말이여! 아무 말 하지 마!” 새댁 주씨는 직감했다. 가슴이 쿵 무너졌다.

남편은 주씨 몰래 정신과에 다니고 있었다. 그 뒤 30년간 치료가 계속됐다. 아버지는 정신과 병원을 들락거렸다. 주씨는 “그이가 5·18에 참가해서 머리가 약간 요상시러운 걸 알았다면, 솔직히 결혼을 했겠소. 몰랐응께 했지”라고 말했다.

 

 

폭력의 끔찍함 겪고 여성폭력 상담가로

아버지 이씨의 트라우마는 식구들에게 ‘전이’되었다. 어머니 주은심씨는 단란한 결혼 생활을 빼앗아간 불행을, 자신의 미래를 앗아간 억울함을 5·18의 정당화에서 찾았다. “느그 아부지가 옳은 일을 했시야. 그거는 니들도 모두 알아야 혀.” 일종의 강박관념이었다. 주씨는 이영은씨가 유치원생일 때부터 5·18 비디오를 보여주었다. 무장을 한 군인들이 시민을 곤봉으로 내리치는 장면은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 버거웠다. 영은씨는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중에야 영상에서 맞고 있는 시민 가운데 한 명이 아버지라는 것을 알았다. 

정신병원 진단 결과 이씨는 ‘대인관계 행동장애와 사회적 적응 능력의 저하로 일에 종사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영은씨는 5·18 2세라는 걸 밝히지 않는다. 상처만큼 깊은 선입견 때문이었다. 5·18 2세라고 밝혔을 때 그녀가 접한 반응은 두 가지였다. ‘보상금도 나왔는데 욕심이 많다’거나 ‘부럽다’이다. 그녀의 친구들은 시민군에 대한 환상과 유공자에게 주어지는 혜택만 보고 “네가 부럽다”라고 말했다. ‘내상’은 보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 어린 영은씨의 바람은 ‘육성회비를 내도 좋으니, 아버지가 안 아팠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사춘기 때는 ‘왜 우리 아빠는 다른 아빠들과 다를까’라는 고민을 참 많이 했다. 어머니가 보여주지 않아도 그땐 혼자 5·18 비디오를 찾아 돌려보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비뚤어지지 않고, 일찍 철이 든 영은씨는 집안 사정을 고려해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지금 영은씨는 여성폭력 상담가로 일하고 있다. 폭력의 끔찍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가족과 떨어져 시골에서 생활한다. 금남로나 도청을 지나치면 ‘그때’가 생각나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영은씨는 대학1년생이던 당시 어머니 주씨가 상담을 받는 일을 목격한 적이 있다. 어머니는 상담 과정에서 “내가 억울해서 그랬는지, 애린 자슥들한테 뭐 땀시 징허디징헌 5·18 비디오를 보여줬을까. 시방은 아조 후회하지라” 하고 눈물을 흘리며 털어놓았다. 영은씨는 “내가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5·18은 계속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영은씨 아버지는 5·18 때 총이라도 들었다지만, 손장관씨(43)의 어머니는 영화 〈26년〉에 나오듯이 지나가다 계엄군한테 몽둥이질을 당했다. 손씨는 1980년 5월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휴교령이 내려져 학교에 가지 않았다. 학교 가지 않는 게 그저 좋았던 장난꾸러기였다. 동심은 어머니의 부상으로 깨졌다. 우유 배달을 하던 어머니 김영임씨(당시 33세)가 계엄군의 무차별 가격으로 머리에 피를 흘린 채 들어왔다. 

 

 

 

 

 


그날 계엄군이 내리친 건 한 가정의 미래였다. 이 사건으로 단란한 가정은 깨졌다. 부상한 어머니는 병원에 가면 다 잡아간다는 소문에 선뜻 병원에도 갈 수 없었다. 동네 사람들이 구해준 ‘마이신(항생제)’ 가루를 뿌렸다. 어머니는 시름시름 앓았다. 5·18이 끝나고 나중에 입원했지만 수술 시기를 놓쳐 합병증까지 왔다. 2년 동안 어머니는 병원 신세를 졌다. 병원비를 대느라 집안은 기울었다. 버스를 운전하던 아버지의 월급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두 칸짜리 전셋집은 어머니의 치료비로 쓰였다. 한 칸짜리 월세집도 수개월을 못 버티고 여관방으로 옮겼다. 손씨는 “어머니는 열심히 살려 한 죄밖에 없었는데 그런 일을 당했다”라고 말했다. 손씨는 2년 동안 학교가 끝나면 병원, 병원에서 다시 학교로 다니길 반복했다. 두 여동생을 밥 먹이고 씻기고, 어머니를 간병하는 일은 손씨 몫이었다. 중학교 1학년이 되던 해, 어머니는 숨을 거뒀다. 중학생 때부터 등하굣길에 빈 병을 줍고 신문 배달을 했지만 육성회비를 댈 형편도 못 되었다. 손씨는 두 동생을 위해, 자신은 학비가 공짜인 공군기술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공군 기술직을 양성하는 공군기술고등학교(현 공군항공과학고등학교)는 졸업과 동시에 하사로 임관한다. 사법시험을 거쳐 판검사가 되어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꿈은 포기했다. 

1988년 군대에 가서도 그는 상처를 받았다. 첫 자대 배치를 받은 곳은 백령도. 도착한 바로 그날 밤, 손씨의 선임이 “전라도 깡패 새끼”라며 손씨를 구타했다. 손씨는 “고향이 광주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깡패라고 부르며 짓밟았다. 당시의 현실이었다”라고 말했다.

 

 

 

“〈26년〉 차마 못 보겠더라”

하사관 시절 그는 직접 전두환씨를 만난 적도 있었다. 부대에 찾아온 그와 악수를 나누며 그는  분노도 뭣도 없었다. 손씨는 “그땐 5·18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다. 대통령이라고 하니 충성 대상일 뿐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광주에 살면서도 5·18 진실에 애써 눈감았다. 5월 단체 일에 관여하던 아버지도 5월만 되면 더 침묵했다. 그저 소주만 들이켰다. 나중에 아버지에게 물어보니 어린 자식들에게는 굳이 광주의 한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였다고 한다. 

손씨는 군대를 전역했고 지금은 광주에 정착했다. 광주교육청 산하기관에서 일한다. 광주민주화운동보상법에 따라 어머니 보상금도 받았다. 지금 아버지가 사는 집은 보상금으로 마련했다. 다섯 식구가 오순도순 밥 먹을 날을 기다리던 어머니가 떠난 뒤에야 보금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손씨도 한 가정을 이뤘다.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할머니 일을 간혹 묻는다. 손씨의 아버지가 그랬듯 그도 역시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5·18 2세 가운데는 영화 〈26년〉을 본 이도 있고, 일부러 보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이영은씨는 〈26년〉을 보았다. 영화사 초청으로 〈26년〉을 본 어머니 주은심씨는 딸이 보지 않기를 바랐다. “뭐랄까. 이제 쪼까 잊고 살려고 아등바등하는데, 가심 속 시커먼 피멍을 우리 아그들에게 넘겨줘서 분노감만 키우는 것 같아 보지 말라고 했지.” 그래도 영은씨는 영화를 보며 심미진이 되었다가 김주안(배수빈)이 되는 등 감정이입을 했다고 한다. 특히 김주안이 “우리 엄마 아버지 빨갱이 아니거든!”이라고 외치는 대목이 가슴에 꽂혔다. “우리 아버지 폭도 아니야.” 이씨가 늘 하던 말이었다. 반면 손장관씨는 영화를 일부러 보지 않았다. 손씨는 “내가 눈물이 많다. 2세들 이야기를 다뤘다고 하는데 눈물을 참을 자신이 없다”라고 말했다. 

영화 〈26년〉의 마지막 장면은 심미진이 ‘그 사람’에게 마지막 한 방을 겨누는 장면이다. 빵! 음향과 함께 페이드아웃(암전). 이렇게 영화는 관객의 상상에 맡기고 끝난다. 현실의 이영은씨와 어머니 주은심씨에게도, 손장관씨와 그의 아버지에게도 투표용지가 마지막 한 방이었을지 모른다. 영화와 달리 현실에서는 결과가 곧장 드러났다. 부산 사람 문재인 후보에 대한 92% 지지율. 서울을 제외한 유일한 노란색. 그렇게 고립된 섬은 깊은 침묵에 빠져 있다. 식당에서도, 카페에서도, 길거리에서도 대통령 선거 이야기 자체를 금기시했다. 영화 〈26년〉은 극장가에서는 막을 내릴 것이다. 그러나 광주에서는, 삶의 스크린에서 계속 상영될 것이다. 당분간은 소리가 제거된 ‘무성영화’로.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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