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와 함께 A학점을>버텔 올먼 지음모멘토 펴냄

여러분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몇 차례나 시험을 보셨는가. 헤아리기 힘드실 거다. 나도 그렇다. 초등학교 때부터 수도 없이 많은 시험을 치렀고, 불행하게도 결과는 대개 좋지 못했다. 이제 나이 쉰 넘어 시험 칠 일이 거의 없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만은 언제나 시험지를 받아든 것처럼 불안하기만 하다. 너무나 오랫동안 가위눌려온 탓이라고 짐작한다.

어려서부터 시험에 유감이 많았다. 아마 항상 성적이 좋지 않아 더했을 것이다. 그건 인정한다. 어쨌건 곰곰이 들여다볼수록 이 시험이란 놈의 정체가 수상쩍었다. 처음에는 하늘같은 선생님들이 다 나 잘되라고 시키시는 일이겠거니 여기며 군말 없이 받아들이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체념하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째서 시험 볼 때면 눈알도 못 돌리고, 오줌이 마려워도 화장실에 못 가고 혼자 끙끙대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정답이라고 해봐야 교과서나 참고서를 잠깐 들춰보거나 똑똑한 친구에게 물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것뿐이 아니던가. 게다가 그 정답이라는 게 과연 살아가는 데 그리 쓸모가 있을지도 의심스러웠다. 그런데도 이런 우스꽝스러운 일을 하고 난 결과는 심각했다. 순식간에 학급에서 내가 몇 등 인간인지 결정됐다. 선생님은 회초리를 들었고, 부모님은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

군에 가서, 학창시절에 나를 괴롭혔던 시험과 제식훈련이 묘하게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교관들이 군화 굽이 다 닳도록 우향 앞으로 가, 좌향 앞으로 가, 뒤로 돌아 가, 하고 신병들을 뺑뺑이 돌리는 이유는 단 하나. 유사시에 자동으로 지휘관의 명령에 따르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우향 앞으로 가’나 ‘좌향 앞으로 가’는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시험 출제자에게도 정답은 제식훈련 구호처럼 의미 없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시험은 출제자의 의도에 맞게 학생들을 움직이게 만들려는 도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형식일 뿐 내용이 아니다. 제식훈련은 정답을 미리 가르쳐준다는 점에서 시험보다는 훨씬 친절하다. 이게 진실이라면 그토록 많은 학생이 정답에 목을 맨다는 게(실제로 목숨을 끊는 친구들도 있지 않은가) 허망하다.

ⓒ한성원 그림

시험이라는 모순된 소동

이 글을 쓰는 다음 날이면 66만명이 넘는 이 땅의 청년이 대입수학능력시험이라는 고역을 치른다. 기이하게도 학생들은 온종일 집단으로 각각 격리된다. 그들은 감독관의 엄격한 감시 아래 홀로 시험문제와 씨름해야 한다. 맥 빠지게도 그들이 채 시험장을 나서기도 전에 유명 사설학원의 전문가들은 언론에 나와 해설까지 곁들여 정답을 발표할 터이다.

그들이 마주한 종이에 쓰인 문제가 인생에서 그토록 중요한 것이라면 그들은 어째서 학교 선생님이나 친구·선후배와 머리를 맞대고 이 문제를 해결하면 안 되는 걸까. 그들을 자기 몸보다 사랑하는 부모는 또 어째서 곁에서 함께 고민하며 이 문제를 푸는 대신 부처님이나 예수님, 혹은 영험하다는 큰 바위 밑에 가서 빌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우리는 인생에서 역경에 처했을 때 대개는 책이나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거나 열렬히 주변에 도움을 청해 탈출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여기에는 어떤 불순한 의도가 개입된 건 아닐까. 이런 모순된 소동의 진정한 출제자는 따로 있는 게 아닐까. 출제자 뒤에는 또 다른 큰 배후가 있는 건 아닐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미국 뉴욕 대학에서 35년간 마르크스 경제학을 가르쳐온 버텔 올먼 교수가 쓴 〈마르크스와 함께 A학점을〉(모멘토, 2012)은 무섭도록 명쾌하게 이 문제를 파헤친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숱하게 치른 시험의 진정한 출제자는 자본주의이다. 그는 은하성단만큼이나 비대해져 그 전모를 도저히 알 수 없을 것 같은 자본주의의 정체를 밝히는 데 아직도 마르크스 경제학보다 유용한 도구는 없다고 믿는다. 그는 자기를 따라 마르크스 경제학을 열심히 공부하면 자본주의를 가동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인 시험도 잘 치를 수 있다고 유혹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그는 책 서두에서 독자에게 거래를 하자고 제안한다. 자기는 이 책에서 자본주의, 즉 사회의 부를 생산하고 분배하는 체제가 어떤 추악한 지경에 이르렀는지 알려주고 싶은데 그 주제에 끌리는 사람은 없을 테니 자기 얘기에 귀를 열어준다면 시험 잘 치는 법을 가르쳐주겠다는 것이다. 그는 학생들이 틈만 나면 속인다는 걸 익히 알기 때문에 두 주제를 마구 섞어놓을 생각이니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먹을 생각은 버리는 게 좋다고 익살을 떤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 민주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많은 운동권 출신자들이 혁명을 포기하고 제도권에 진입했다. 그들이 생각보다 훨씬 쉽게 사법고시에 합격하거나 논술 시장에 뛰어들어 떼돈 버는 걸 바라보면서 항간에는 〈자본론〉을 배우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얘기가 떠돌았다. 이 책을 읽으면 그것이 결코 근거 없는 얘기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만큼 자본주의의 속내에 천착한 사람이 없었던 만큼 마르크스를 이해하면 자본주의에 대한 적응력이 커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쯤에서 나도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어졌다. 때가 때(수능시험)인 만큼, 정해진 지면을 이미 거의 다 써버린 만큼 여기서는 저자가 말하는 자본주의와 시험의 관계에 대해서만 집중하겠다. 그 대신 여러분은 이 책을 끝까지 정독해보시라고 권한다. 처음 이 책을 읽어 내려갈 때는 저자가 젊은 학자인 줄로만 알았다. 재기발랄하기 이를 데 없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가 카페에서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깔깔댄 게 몇 번인지 모른다. 그런데 저자는 1935년생, 내일모레면 70을 바라보는 석학이었다. 젊은 학자들이 유행이 지났다며 외면해버린 마르크스 경제학만을 붙들고 한 우물을 파온 분이다. 자본주의가 제 살을 뜯어먹을 정도로 허기지고 포악한 맹수로 변해버린 지금 그의 통찰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빛난다.


왜 빨리 생각하고 쓰도록 하는가

저자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험은 여러 방식으로 학생을 조련한다. 과제를 해결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하는 시간과 형식을 규정함으로써 앞으로 겪게 될 더욱 엄격한 노동 규율에 익숙하게 한다. 평소보다 빨리 생각하고 쓰도록 강요해서 직장에서 맞닥뜨리게 될 속도전에 정서적·도덕적으로 준비하게 한다. 시험공부를 하면서 습득하는 자제력은 직장에서 무례, 인신공격, 권태를 참고 견디게 한다. 이의를 허용하지 않는 문제를 풀면서 미래의 고용주가 내릴 명령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습관을 기른다. 절대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 교사는 계층의 윗사람들이 똑똑하다는 착각을 부른다. 대부분의 교사는 학생을 사랑하는데 그 때문에 계층 구조에서 비슷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당연히 그러리라고 잘못 가정하게 한다. 낙제라는 가차 없는 처벌은 훗날 삶을 불안에 빠뜨린다. 학생 앞에는 언제나 모르는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기 때문에 자기가 기존 제도를 비판하기에 충분히 아는지 확신하지 못하게 한다. 무엇보다 홀로 문제를 해결하게 함으로써 다른 이들과 분리되고 모든 잘잘못은 다 내 탓이라는 자괴감에 빠지도록 만든다. 이런 시험의 배후에는 기업가와 그들의 변호사로 채워진 대학의 이사회가 있으며 거대한 자본주의가 그 뒤를 받친다. 시험은 본질적으로 통제의 수단이자 어떻게 통제받을지를 배우는 수단이다.

저자는 상상력에 작은 놀이터만 제공하면 이 모든 사기가 한눈에 보일 거고, 그때 비로소 거기서 빠져나갈 힘이 생긴다고 말한다. 저자처럼 자본주의를 제거하지 않으면 진정한 자유는 없다고 믿지 않는 사람이더라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앞으로 치를 모든 시험에서 조금은 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테니까. 그건 장담한다.

기자명 문정우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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