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피터 노왁 지음문학동네 펴냄

미국 텔레비전 방송 CBS 온라인 뉴스 과학기술 전문기자인 피터 노왁이 쓴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문학동네 펴냄, 2012)는 우리가 어디에 일상을 기대고 있는지 잘 말해주는 책이다. 그에 따르면 세상은 복잡한 듯하지만 의외로 단순하다. 양파껍질을 벗기듯 세상 속으로 들어가 보면 결국 전쟁과 섹스와 음식이라는 세 가지와 마주치게 된다고 말한다. 현대의 삶을 지배하는 모든 문명의 이기는 실상 알고 보면 이 세 가지를 충족하려다 보니 발전한 도구와 다름없다.

최근 가수 김장훈씨가 미국의 재벌 상속녀 패리스 힐튼과 뮤직비디오를 찍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일이 있다. 돈을 버는 족족 어려운 사람들에게 희사하는 바른생활 사나이인 김씨가 어째서 재능보다는 난잡한 사생활로 유명한 그녀와 어울리게 됐을까 신기하게 생각했는데, 피터 노왁 기자 역시 패리스 힐튼에 꽂혀서 이 책을 썼다. 정확하게 말하면 2004년 그녀가 남자 친구인 릭 살로몬과 찍은 섹스 비디오를 보고 나서 영감을 얻게 됐다. 패리스 힐튼의 현란한 섹스 테크닉에 끌려서가 아니라 비디오 화면이 온통 초록색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에도 언젠가 이런 장면을 인상 깊게 본 일이 있었다. 1991년 미국과 다국적군이 이라크를 공격한 ‘사막의 폭풍’ 작전 때였다. 당시 CNN은 미군의 야간 폭격 장면을 생중계해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겼는데 그때 화면이 온통 에메랄드빛이었다. 조명 없는 곳에서 촬영하는 야간 투시 기법이 겨우 10여 년 만에 섹스 비디오에 등장했던 것이다.

그는 걸프 전쟁과 섹스 비디오의 관계를 생각하다 문득 군에서 개발한 기술을 가져다 소비재에 접목한 다른 예가 뭐가 있을까 궁금해졌다. 깊이 캐면 캘수록 소비재에 쓰는 거의 모든 기술이 군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비닐봉지부터 헤어스프레이, 비타민, 구글 어스까지. 그뿐이 아니었다. 인간의 성적 욕망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포르노그래피 기술과 전쟁 사이에도 깊은 관련이 있었다. 

ⓒ한성원 그림

‘메이드 인 유에스 아미’

중요 관계자는 또 있었다. 바로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다. 현대 식품업계를 지탱하는 조리·저장·가공 기술이 거의 모두 ‘메이드 인 유에스 아미’란 사실이 드러났다. 전쟁과 포르노와 음식이 서로서로 첨단 기술을 주고받으며 삼위일체를 이뤄 세상을 움직여 나간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그는 혼자 했다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방대한 취재를 통해 우리를 현대의 요지경 속으로 안내한다.

제2차 세계대전은 카메라를 소형화하고 영화 기술을 표준화했다. 대거 참전한 할리우드 기술자들은 전쟁이 끝난 뒤 미국 사회에 수많은 아마추어 영화 제작자를 풀어놓았다. 이들이 포르노그래피 산업을 주도했다. 때맞춰 불기 시작한 성혁명 물결을 등에 업고 포르노 산업은 폭발했다.

2차 대전이 낳은 또 다른 걸작은 레이더와 스팸이다. 영국과 미국의 기술자가 합작해 만든 레이더는 수많은 인명을 살리고 또 죽였다. 연합국 측 민간인과 군인의 목숨은 구했지만 미군 폭격기를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로 안내해 두 곳에서 22만명을 학살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전쟁이 끝난 뒤 기술자들은 요리기구에 이 레이더 기술을 접목하는 작업에 매달렸고 마침내 결실을 보았다. 그것이 요리 시간을 극적으로 줄여준 전자레인지이다. 

원자탄을 만들 때 밀폐제로 사용했던 테플론은 프라이팬 밑바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기술을 받아 들여 떼부자가 된 기업이 바로 테팔이다. 통조림 기술은 유럽 정복에 나선 나폴레옹의 주도로 개발됐다. 1941년 미군이 전시 식량으로 채택한 것이 통조림 기술의 결정판인 스팸이었다. 스팸은 미군이 주둔한 태평양제도에 당뇨병과 뇌졸중, 심장병이 흑사병처럼 번지게 만들었고 지금도 전 세계를 횡행한다. 


이 정도는 서곡에 불과했다. 1957년 10월 4일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자 미국은 기절할 듯 놀랐다. 소련이 버튼 하나만 누르면 미국을 쓸어버릴 수 있는 기술을 가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소련을 압도하려고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과 미국항공우주국(NASA), 그리고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많은 연구기관을 만들었다. 

이들은 민간 기업이 엄두도 낼 수 없는 앞서 나가는 장기 연구를 주로 수행하는데 대표적인 열매가 바로 인터넷이다. 그 밖에 휴대전화, 컴퓨터 그래픽스, 기상 위성, 연료전지, 레이저, 인간을 달에 데려다준 로켓, 로봇 등을 모두 이들이 만들었다. 그리고 이 기술의 얼리어답터는 언제나 포르노와 음식 산업이었다.

인터넷 업계의 진정한 강자는 구글·애플·아마존·이베이·야후가 아니다. 회사 규모가 작고 상장도 하지 않은 포르노 회사들이 이들 기업 모두의 수익을 합친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어들인다. 이들은 미국의 군사기술을 빛보다 빠른 속도로 받아들여 인터넷 기술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화상회의, 다양한 결제 방식, 실시간 채팅 기술을 모두 이들이 개발했다. 

서버를 우리가 듣도 보도 못한 남미의 가이아나 같은 개발도상국으로 옮겨놓아 세계 각국의 규제 노력을 무력화한 것도 이들 작품이다. IT업계의 주류 회사들은 포르노 사이트 웹 마스터들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언제라도 거액을 지불할 준비가 돼 있지만 이들은 좀처럼 자리를 옮기려 하지 않는다. 포르노 업계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가능하고 보수도 높은 꿈의 직장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성폭력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인터넷 포르노물 규제 얘기가 나오지만 이는 실상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꿈의 직장 된 포르노 업체

이들은 공짜 콘텐츠의 범람으로 잠시 주춤한 상태인데 미국이 이라크 전쟁과 아프간 전쟁에서 선보인 로봇기술과 팔다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해 개발한 촉감기술을 받아들여 또 한 번 도약할 준비를 한다. 섹스 로봇을 만들려는 것이다.

냉전 시절 미국이 공산화 도미노를 막으려고 야심차게 준비한 비장의 무기 중 하나가 녹색 혁명이다. 전통적인 유전학과 화학을 결합해 병충해에 강하고 소출도 많은 신품종을 만들어내 기아로 공산화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다는 계획이었다. 녹색혁명은 멕시코·인도·파키스탄에서 성공을 거뒀고 유전자 변형 종자의 개발로 이어졌다. 

이 유전자 변형 종자의 보급은 유럽에서는 광우병 발병으로 격렬한 반대의 벽에 부딪혀 답보 상태이다. 그러나 미국과 캐나다를 비롯한 비유럽 쪽으로는 빠르게 확산 중이다. 미군으로부터 가공·처리·저장·포장·유통 기술까지 전수받은 맥도널드 같은 패스트푸드 업체와 몬산토가 만든 유전자 변형 종자는 지금 미군보다도 훨씬 기운차게 세계를 정복해가는 중이다.

이 책을 읽은 것은 몇 달 전이다. 꼭 소개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엄두를 내기 힘들었다. 파괴와 살육의 기술이 세상에 돌아와 우리의 삶을 재구성하는 이런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리가 미국에서 살든 중국에서 살든, 그 어디든 섹스와 폭탄과 버거가 빚어내는 삶을 피할 수는 없으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기술 반대론자의 걱정과 달리 우리 삶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꽤 나아지리라고 낙관한다. 서두에서 인용한 공상과학 소설 작가 올더스 헉슬리의 말대로 우리는 과학의 초기 성공이 가져다준 기분 좋은 술기운이 아니라 이튿날 아침 찾아온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고는 있지만, 그의 말이 옳았으면 좋겠다.

기자명 문정우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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