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도에 묻히다>우쓰미 아이코, 무라이 요시노리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걸그룹 소녀시대를 보고 있자면 절로 입이 귀에 걸린다. 세상에 젊음처럼 화려한 것은 없다는 말이 실감난다. 중견 배우 최민식씨가 텔레비전 인기 프로그램 〈힐링캠프-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해, 소녀시대가 ‘소원을 말해봐’라고 노래 부르면 자기도 모르게 몇 가지 중얼거리게 된다고 해서 좌중을 웃겼는데 공감이 간다.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지만 아마 그런 소녀시대에게서도 발 고린내나 입 냄새는 나지 않겠는가. 강남 스타일이라도 피치 못할 사정은 있는 법이다.

일본의 마지막 지성이라 불리는 사상가 후지다 쇼조 씨는 〈전체주의의 시대경험〉(창작과비평사 펴냄, 1998년)이란 책에서 일본 사회를 통렬히 꾸짖는다. 그는 군국주의라는 지옥을 경험한 사회가 다시 전체주의로 치닫는 것은 ‘안락’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안락이란 조금이라도 불쾌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거나 고통을 가하는 것은 무조건 없애고 싶어하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보수화·반동화하는 일본 사회의 밑바닥에는 과거의 추악한 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하는 광기가 깔려 있다고 그는 믿는다. 그는 생명체라면 불쾌감과 공존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있다고 충고한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불편한 기억은 모두 잊고 대통합·화합하며 현재만 즐기고 살 수 있으면 좋겠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현재는 과거의 산물이라 당연히 단절되지 않는다. 정리되지 않은 과거는 언제든 불쑥불쑥 소환되게 마련이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꽃다발을 들고 백번 전태일 동상을 찾는다 한들, 일본 우익이 올림픽 스타디움을 욱일승천기로 도배한다 한들 어두운 과거를 덮을 수는 없다. 과거의 국가 폭력을 직시하고 그것이 현재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몰아내야만 두 나라 국민은 비로소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학자인 우쓰미 아이코 씨와 무라이 요시노리 씨가 쓴 〈적도에 묻히다〉(역사비평사 펴냄, 2012년)는 바로 그런 얘기를 하는 책이다. 1980년 7월 일본에서 초판이 나온 뒤 한국어판은 두 차례 출판되었다. 하지만 두 번 모두 저자의 동의를 받지 않은 해적 출판이었다. 이번 정본 발간은 무려 32년 만인데 반갑게도 저자들이 한국 독자에게 전하고 싶었지만 그동안 가슴에만 묻어두었던 말을 담은 한국어판 서문이 실렸다. 저자들은 서문에서 머지않아 한·일 관계에서 고통이나 슬픔, 그리고 억울함이 사라지기를 소망한다고 썼다. 


4년 반 동안 조선인 군무원 발자취 더듬어

부부이기도 한 두 저자는 그런 말을 할 충분한 자격이 있다. 와세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우쓰미 씨는 일본조선연구소 연구원으로서 원래 재일 조선인 문제에 관심이 깊었다. 그녀는 재일 조선인 가운데 옛 일본군 군무원 신분으로 남방에 종군했다가 전쟁이 끝난 뒤 B, C급 전범으로 내몰려 일본의 전쟁 책임을 뒤집어쓴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1975년 1월 현대 인도네시아를 연구하던 남편 무라이 씨가 반둥으로 유학할 기회가 생기자 조선인 군무원 실태를 본격적으로 조사하려고 동행했다. 


그해 11월 두 사람은 우연히 반둥의 동남쪽 가롯에서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어 연합군에 사형당한 일본인 3명이 독립 영웅으로서 재매장되는 행사에 참석했는데 그중 한 명이 조선인 군무원 양칠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뒤 낯도 코도 모르던 조선인 군무원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4년 반 동안이나 한국, 네덜란드, 싱가포르, 타이로 발품을 팔았다. 이 책이 바로 그 결실이다.

이 책은 상상 이상으로 드라마틱하다. 한번 잡으면 좀처럼 손에서 놓을 수 없다. 사실이 어떤 허구보다 힘이 세다는 말을 절감할 수 있다. 한국인이 썼다고 해도 그럴 수 있었을까 싶게 피해자인 조선 군무원들의 시각에서, 아니 인류 보편의 가치란 잣대로 이 문제를 바라보려 애썼다.

대동아 공영을 부르짖던 일본 제국 군대는 1941년 12월8일 오전 3시 진주만 공격을 개시하기 한 시간 전에 말레이반도 상륙을 개시했다. 그 뒤 파죽지세로 필리핀, 홍콩을 점령하고 이듬해인 3월9일 마침내 유전을 확보하기 위한 마지막 목표인 인도네시아 자바 섬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포로로 잡은 백인 군인만 26만명이 넘었다.

바로 이 어마어마한 수의 백인 포로를 관리할 인원을 보충하려고 뽑은 이들이 조선의 군무원이었다. 면사무소 서기와 순사까지 동원한 끝에 조선 각지에서 청년 3223명을 그러모았다. 월 급여 50엔(일본군 병사 월급 7엔)은 출구 없는 식민지의 청년에게는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기도 했다. 월급은 많이 받았지만 일본 군대에서의 위치는 이등병보다도 낮았다. 조선 청년들은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은 뒤 1942년 8월19일 밤 듣도 보도 못했던 남방의 이국을 향해 부산항을 출발했다.

일본 군대는 국제 협약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포로를 전쟁 수행을 위한 전초기지 건설에 내몰았다. 그중에서 〈콰이강의 다리〉라는 영화로 유명해진, 타이와 미얀마를 잇는 철도 건설 현장과 인도네시아 암본 섬 등지의 비행장을 건설하는 현장이 가장 악명 높았다. 침목 하나에 목숨 하나라는 얘기까지 나왔던 타이 철로 건설 현장에서 포로 1만3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암본 섬 등의 비행장 공사에서는 포로 2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현장에서 일본군을 대신해 최전선에서 온갖 궂은일과 악역을 담당한 이들이 조선의 군무원이었다. 포로의 원성을 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한성원 그림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사람들

연합국의 타이 전범재판에서 포로수용소 관계자 69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그중 48%인 33명이 조선 군무원이었다. 인도네시아 비행장 건설 관계자에 대한 전범재판에서도 조선 군무원은 중형을 받았다. 무려 9명이나 사형당했다. 저자들은 하급 노동자에 불과한 조선 군무원들이 지휘 라인에 있었던 일본인 장성 못지않은 중형을 받은 것은 전범재판이 얼마나 불공정했는지 말해준다고 썼다.

당시 연합국 측의 네덜란드군은 식민지를 되찾으려고 인도네시아 독립군과 전쟁을 벌이던 중이었다. 연합군 법정은 일본의 패망에 꿈을 잃은 일본군 다수가 인도네시아 독립군에 가담한 데 앙심을 품고 엉뚱하게 조선 군무원에게 화풀이를 한 혐의가 짙다.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조선의 군무원은 영문도 모르고 죽어나갔다.

전범재판을 피하거나 현지인과 가정을 꾸려 남아야 했던 이들은 양칠성씨처럼 인도네시아 독립군에 가담했다. 일본은 나중에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일본군 사망자 명단(조선 군무원 포함)을 받았지만 일본인 유족에게만 그 사실을 전했다. 저자들이 조선 군무원들을 조사하게 된 것은 어떻게든 치부를 감추기만 하려는 일본 정부의 처사에 분개해서다.

조선의 군무원들은 고려독립청년당이라는 항일 비밀결사체를 결성했다. 조직원은 피로 함께 죽기를 맹세한 혈맹당원 10명을 포함해 모두 26명, 그들 중 3명은 반란을 일으켜 일본군 10여 명을 살상하고 자결했다. 나머지는 동료의 밀고로 수감됐다가 일본이 패망한 뒤 풀려났다. 저자들의 노력으로 이들 중 혈맹당원 9명이 국가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정부에 16차례 청원한 끝이었다.

이 책을 번역한 이가 김종익씨란 점이 예사롭지 않다. 이명박 정부의 민간인 사찰 피해자인 바로 그 사람이다. 김씨는 노무현 정부의 실세였던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와 동향이란 이유만으로 신상을 털린 끝에 KB한마음 대표직에서도 쫓겨나고 주식도 강제 이전당했다. 군대에 간 아들과 가족, 지인들도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겪었다. 

그는 번역 후기에서 혈맹당원들이 자살하는 대목을 번역한 뒤 며칠 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고 썼다. 본인이 불의한 정치권력에 장악당한 국가와 맞서다가 자기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수단인 죽음의 유혹에 시달려봤기 때문이다. 일제를 계승한 군부독재의 유산인 민간인 사찰 피해자 김종익씨야말로 제국주의와의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 아니겠는가.

기자명 문정우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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