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 범죄’는 이 세상에 없다
  • 김은지 기자
  • 호수 260
  • 승인 2012.09.13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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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연이어 터진 ‘묻지마 살인’은 현실에 대한 절망과 분노가 숨은 동기다. 통계적으로도 양극화가 심해질수록 범죄율이 높아진다. 전문가들은 처벌 강화 이전에 사회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8월22일 여의도 칼부림 사건을 일으킨 김 아무개씨(30)는 전과가 없다. 정신이상자도 아니었다. 현재는 실직자이지만 그 전까지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범행 후 그는 후회한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현장검증에서는 흐느끼며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어했다. 전 직장 동료에 대한 복수심에 살인까지 계획한 범죄자와는 사뭇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한 것일까. 전문가들은 범행 촉발 요인과 본질적인 동기를 구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자신을 왕따시킨 동료들에 대한 복수심’이란 일종의 촉발 요인일 뿐 범행의 본질적인 동기는 따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권일용 경감은 “예를 들어 누군가 부모에게 꾸지람을 들었다는 이유로 사람을 살해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꾸지람이라는 촉발 요인에 의해 내재된 분노가 폭발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라고 설명한다(<수사연구사>, 2006년 4월). 

   
ⓒ연합뉴스
여의도 칼부림 사건을 일으킨 실직자 김씨의 고시원 방.

김씨의 경우 전 직장 동료에 대한 분노가 범죄를 촉발하기는 했지만, 그간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삶이 어려워지면서 분노가 쌓인 정황이 엿보인다. 김씨 사건이 ‘절망 살인’ ‘증오 살인’ 등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세상에 대한 증오와 절망이 폭력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해석이다. 이수정 경기대 교수(범죄심리학)는 “모든 살인은 절망에서 비롯된다. 절망하지 않고서 어떻게 살인을 저지르나. 여의도 칼부림에서 가해자 김씨가 처한 상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직장 다닐 때의 원한관계가 범죄를 꾸미게 했고 실제로 전 직장 동료를 표적으로 삼았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복수극인데,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까지 칼로 찔렀다. 분노 조절에 실패한 듯 보인다”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쫓아오는 것 같아 (행인들을) 찔렀다”라는 김씨의 진술에도 관심을 보였다. “이런 표현은 과한 피해의식이 쌓였다는 의미인데, 어떤 과거사가 있는지 살펴야 한다”라는 것이다.

김씨가 범행 전과 범행 후 계속해서 자살을 생각했다고 밝힌 점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그는 경찰 진술에서 범행 두 달 전부터 자살 충동이 일었다고 말했다. 국내 1호 범죄심리학자로 불리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범죄심리과 강덕지 전 과장은 “칼부림과 자살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분노·좌절 그리고 파괴심이 안으로 표출되느냐 밖으로 표출되느냐에 따라 외양이 다를 뿐, 본질적으로는 같다”라고 말했다. 

묻지마 범죄’ 용어 자체가 본질 흐려

강 전 과장은 김씨의 잦은 실업과 취업을 분노의 원인으로 보았다. 패자 부활이 되지 않는 사회적 환경이 그를 좌절로 몰아넣고 그것이 분노로 이어졌다는 해석이다. ‘사형수의 대모’라 불리는 조성애 수녀도 비슷한 생각이다. 그는 이번 사건을 보면서 21년 전 여의도에서 일어났던 차량 질주를 떠올렸다. 당시 스물한 살이던 범인 김용제씨는 차를 몰고 여의도광장에 돌진해 두 명을 숨지게 하고 스물한 명을 다치게 만들었다. 1997년 김영삼 정부가 임기 말 사형을 단행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마지막 사형수’ 김씨와 3~4년간 교류를 했던 조성애 수녀는 이번 사건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했다. “요셉 형제(김용제씨 세례명)는 어릴 적 시력 장애로 버림을 받았고 그 이후 계속해서 취직을 하지 못하면서 점점 인생이 수렁에 빠졌다. 그가 저지른 범죄는 나쁜 것이지만, 나약한 사람에게 손길을 내밀어주지 못한 사회도 한번 되돌아봐야 한다.”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범죄율이 달라진다는 것은 통계로도 뒷받침된다. LG경제연구원이 2005년에 낸 <자살, 이혼, 범죄 그리고 경제> 보고서에 따르면 자살·이혼·범죄 증가율과 소득 10분위 배율(상위 10%의 소득을 하위 10%의 소득으로 나눈 것)의 변화 추이는 비슷한 궤적을 그린다(표 참조). 특히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소득 양극화가 심해지고 범죄 또한 큰 폭으로 늘었다. 외환위기 이전 인구 10만명당 674건 수준이었던 범죄 건수(형법 기준)는 외환위기 이후 강력범죄와 재산범죄가 급증하면서 평균 1127건을 기록해 2배 가까이 증가했다. 세상이 갈수록 살기 어려워졌고 그만큼 범죄도 늘어났다는 뜻이다.

이와 더불어 이른바 ‘묻지마 범죄’도 늘어난다. 치정이나 복수, 금품 등을 노린 기존 범죄와 달리 현실 그 자체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범죄가 증가하는 것이다. 경찰청은 2006년부터 범죄 동기별 분류 항목에 ‘현실 불만’ 범죄를 넣고 있는데, 전체 범죄 중 현실 불만 범죄가 차지하는 비율은 2006년 0.56%(1만1283건)에서 2010년 0.64%(1만2719건)로 늘어났다. 눈에 확 띄는 증가율은 아니지만 강덕지 전 과장은 “현실 불만 범죄가 늘고 있다는 흐름에 주목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최근 의정부·수원 등지에서 행인에게 무차별로 흉기를 휘두른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 뒤 경찰청은 이들 ‘묻지마 범죄’를 저지른 피의자들을 면담 중이다. 프로파일링 작업을 통해 범죄 내용을 분석하고 범죄자 관련 대책을 수립할 계획이다. 검찰 또한 ‘묻지마 범죄’ 관련 전담 부서 신설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구형 기준을 강화해 일반 범죄보다 구형을 더 중하게 하고, 강력범에 대해서는 보호수용제도 도입을 검토하겠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식의 접근으로는 사후약방문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강덕지 전 과장은 “신호를 지킬 사람이 없는데 신호등만 만드는 게 능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묻지마 범죄 같은 사회 분노형 범죄를 저지르는 강력범들은 대개 사회적으로 낙오하고 나약한 사람이다. 이들을 위한 사회적인 안전망 구축이 함께 마련되어야 하는데 사건이 터질 때만 정부·언론 등이 반짝 관심을 가지고, 시간이 지나면 금세 수그러들고 만다”라는 것이다.

나아가 ‘묻지마 범죄’라는 용어 자체가 사건의 본질을 흐린다고 지적하는 전문가도 적지 않다. 이수정 교수는 “‘묻지마 범죄’는 언론에서 지어내 쉽게 부르는 용어일 뿐, 세상에 동기 없는 범죄는 없다”라고 말했다. “돈·치정·원한과 같은 전통적인 살인 동기가 아닌 이유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기존 틀에서 설명할 수 없는 범죄 부류에 그런 이름을 붙이는 것 같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예측하기 힘든 범죄에 대해 학계에서 ‘무동기 범죄’로 명명하기도 하는데 정말 동기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더욱이 묻지마 식의 프레이밍이 고착되면 범죄 원인과 분석에서 놓치는 면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이번 여의도 칼부림 사건에 지대한 관심이 쏟아진 데에는 누구나 범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만이 아니라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 또한 드러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강덕지 전 과장은 이번 사건이야말로 ‘현재의 한국 사회를 압축해 보여주는 징후적 사건’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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