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권력을 혐오한다. ‘권리’는 신성하지만 ‘권력’은 어떤 식이 됐든 혐오스럽다는 식이다. 그런데 그래도 되는 걸까. 그 둘은 정말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일까.

어느 국제 여성단체가 개발도상국 여자 어린이들에게 컴퓨터를 보내기로 했다. 컴퓨터는 틀림없이 그 아이들이 있는 집에 전달됐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가 발생했다. 그 집에서 컴퓨터를 사용하게 되는 건 결국 아버지와 남자 형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 개발도상국 여자 어린이들의 손에 컴퓨터를 쥐여주려면 컴퓨터와 함께 그것을 사용할 권한도 함께 배송해야 했던 것이다.

여기에 혐오해서는 안 될 작은 권력들이 숨어 있다. 나라를 좌지우지하거나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널리 가정용으로도 사용되곤 하는 일상의 작은 권력들. 그 권력이 없으면 인간은 눈앞에 놓인 물건 하나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은 권력은 휴가에도 얽혀 있다.

대부분 직장인에게는 휴가가 있다. 15일, 20일. 더 적은 데도 있고 더 많은 데도 있지만 아무튼 휴가 일수는 반드시 정해져 있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 그 휴가 일수 다 챙겨먹는 직장인이 얼마나 될까. 왜 뻔히 있는 휴가를 손에 쥘 수가 없는 걸까. 답은 똑같다. 우리 사회가 묘한 방식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우리 주위에 머물러 있어야 할 작은 권력들이 자꾸만 다른 누군가에게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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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이 사회를 기울이는 방식은 다양하다. 예를 들어 사무실 안 책상 배치를 보자. 누가 누구를 바라보게 배치되어 있을까. 말단 직원이 보스의 등 뒤를 바라보게 되어 있는 배치는 어디에도 없다. 늘 높은 사람이 부하 직원을 바라보는 곳에 위치한다. 시선은 언제나 권력 방향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휴가를 내는 과정에도 그런 소소한 장치들이 들어가 있다. 한국에서 휴가는 내 것을 내가 필요할 때 쓰는 게 아니라, 회사가 허락할 때 ‘재충전을 전제로’ 특별히 허락되는 무언가로 변질되어 있다. 정해진 휴가 일수 이상을 요구하는 것도 아닌데 회사는 언제나 휴가 사유를 요구하고, 심지어 생리휴가를 내겠다는데 이유를 묻는 조직도 있다. 그런데 이런 건 당연하게 받아들일 기울기가 아니다. 어딘가에 명시되어 있는 ‘권리’대로라면 사유를 대는 건 개인이 아니라 오히려 회사여야 한다. 어느 기간에 누군가가 휴가를 가서는 안 되는 특별한 사유가 있다면, 회사가 그 이유를 개인에게 설명하고 납득시키는 게 당연한 이치다.

권력이 있어야 권리도 쓸 수 있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까. 그것은 ‘권리’가 어딘가에 명시되어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휴가와 함께 세트로 주어져야 할 ‘휴가를 낼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앞에 놓인 물건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일상을 돕는 작은 권력들이 영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그 권력은 또 어떻게 되찾을 거냐고. 꽤 거대한 권력이 어딘가에 쌓여 있기는 해야 그런 작은 권력들도 다시 돌려받을 수 있는 게 아니냐고. 그래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공권력이라는 걸 따로 만들어서 축적해 두곤 한다. 그 작은 권력들로부터 정당성을 얻고, 다시 그 작은 권력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큰 권력을.

그래서 하는 말이다. 모든 권력을 혐오하지는 말자. 그래야 그 권력에 대한 통제권을 잃지 않을 수 있다. 개발도상국 여자 어린이에게나 휴가 못 가는 한국 직장인에게나 이 공식은 아마도 똑같이 유효할 것이다.

기자명 배명훈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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