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ickr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오른쪽)은 9·11 이후 더욱 존재감을 갖게 되었다.
올해는 유럽의 철학자 아감벤과 랑시에르의 저작이 한국에 도착한 원년으로 기록될 만하다. 어느 전문지에서는 아예 ‘한국 공습’이라는 제목으로 이들의 상륙을 알렸다. 유럽은 1990년대 후반부터 이들이 제기한 논제로 떠들썩했거니와 그 풍문은 한국에도 일찌감치 알려졌다. 정작 그들의 주요 저작은 제대로 소개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2004년 이후에는 ‘왜 그들의 저작이 번역되지 않는지 의아하다’는 볼멘소리가 나올 지경이었다. 그 사이 젊은 연구자가 알아서 번역 작업에 착수해 그 내용이 사이버 공간에 돌아다니기도 했다. 늦었지만 거세다.

올해 쏟아져 나올 두 철학자의 번역물은 줄잡아 10여 편에 이른다. 먼저 선을 보인 것은 자크 랑시에르의 저작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인간사랑 펴냄)를 비롯해 〈감성의 분할〉(도서출판b 펴냄)이 출간되었다. 조르조 아감벤의 저작 〈호모 사케르〉 1권(새물결 펴냄)도 첫 테이프를 끊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를 통해 한국에 첫 발을 디딘 랑시에르는, 반목의 철학자 혹은 불화하는 철학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평등의 옹호자로도 알려졌다. 기회의 평등이 아니다. 오히려 기회의 평등이란 무한경쟁과 그로 인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알리바이가 될 뿐이라는, 근본 태도를 취한다.

근대국가의 폭력 혹은 무능력에 대한 성찰

랑시에르는 1970년대에 일찍이 자신의 스승인 알튀세르를 ‘기성 엘리트 권력의 옹호자’라고 비판하면서 떠들썩하게 절연했고, 이후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은 채 활발한 저작 활동을 벌였다. 그는 끊임없이 정치와 철학을 말하지만, 전통 의미의 정치철학자는 아니다. 오히려 기성의 정치철학이라는 학문 분야 자체를 품평 대상으로 삼는다고 평가받는다.

이를테면 그는 사람들이 보통 ‘정치’라고 받아들이는, 분배에 관한 합의 절차가 사실 정치가 아닌 ‘치안(Police)’에 속하는 일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때의 치안은, 협의의 질서 유지뿐 아니라 구성원에게 몫을 찾아주기 위해 사회가 행하는 모든 활동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그런 분배의 과정이란, 이미 분배받을 권리를 인정받은 사람이 자기 몫을 찾아가는 것일 따름이다. 분배 방식을 놓고 논란할 수 있겠지만, 누가 분배받을 자격이 있는가는 묻지 않는다.   

랑시에르가 보기에 본래 의미의 진짜 정치란, 기성의 관점에서 볼 때 공동체에 별반 기여한 것이 없어 자기 몫을 주장할 수 없는 자들이 ‘뻔뻔스럽게도’ 평등주의 논리에 입각해 자기 몫을 주장할 때 발생한다. 몫이 없는 자들이 자기 존재를 인정받아 공동체를 완전히 새로운 원리에 따라 재구성하도록 강제하는 ‘범법 활동’이라는 것이다.

그는 예를 들어 민주주의라는 것 자체가 기득권자에게는 불온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등장했음을 환기시킨다. 데모크라시의 어원인 데모스, 즉 평민이 귀족 정치인이나 과두 독재자와 동등한 자격을 요구하고 나선 과정을 보라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의 데모스로부터 폴란드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배제된 자들이 통치하는 엘리트에 항의했을 때, 그들은 단지 임금 인상이나 작업 조건 따위 드러난 요구뿐 아니라 동등한 상대자로 인정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권리를 얻는 것이 진정한 목표였다고 말한다. 달리 보자면 폴란드의 기성 지배층인 노멘클라투라가 자유노조(솔리데리티)를 동등한 상대자로 받아들여야 했던 그 순간 지배층은 이미 패배했다고 본다. 
  

이미 권리가 있는 자들 사이의 분배 과정을 관리하는 것은 ‘치안’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자크 랑시에르.
그가 현대 사회에서 관심을 기울이는 대상은, 정체적 주체로 인정받은 노동계급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미 발언권을 얻은 노동자 외에도 정당하게 자신을 대변하지 못하는 다양한 특수집단, 사회에서 배제되어 있으나 자기들의 곤경을 정치화하는 데 더더욱 가로막혀 있는 ‘이주자’ 등에게 눈을 돌린다. 그들이 말을 해도, 사회는 그 말을 듣지 못한다. 혹은 듣지 않는다. 목소리가 없는 자인 것이다.

한 사회에서 말할 공간이 없으므로 지워진 것으로 간주되는 ‘배제된 자’에 관한 랑시에르의  관심은, 조르조 아감벤이 말하는 ‘호모 사케르(Homo Sacaer)’라는 개념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 호모 사케르는, 직역하면 성스러운 자이지만 현실에서는 불결한 것으로 간주되는 자이다. 로마법에 등장하는 개념으로 ‘희생양(제물)로 삼을 수 없지만, 그를 죽여도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아감벤에 따르면 그들은 희생 제의의 제물이 될 수 없고, 반대로 누군가 그들을 죽여도 그 행위는 처벌받지 않는다. 체제가 체제 바깥으로 밀어낸 자인 셈이다. 

한국의 젊은 연구자들은 이미 ‘미등록’ 이주 노동자, 흔히 불법 체류자로 불리는 이들의 처지를 환기시키면서 이 개념을 원용하곤 했다. 수유+너머 고병권 연구위원은 “미등록 이주 노동자야말로 한국 사회의 호모 사케르다”라고 지적한다.  산업적으로 엄연히 의미 있는 존재인 이들이, 정치 사회적 신분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법 체류자에게는 고용주가 임금을 체불하고 폭행을 일삼아도, 가해자는 별 처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피해자가 출입국관리소에 넘겨질 뿐이다. 고씨는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라는 예외 존재가 권력의 정상 작동을 폭로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사회의 예외적 존재인 미등록 이주 노동자 역시 우리 사회의 정상성이 무엇인지를 폭로한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바로 우리 얼굴, 우리의 야만이다”라고 지적한다. 

〈문학과 사회〉 편집위원인 김태환은 ‘푸코가 법의 형식 속에서 작동하는 억압 권력의 기제를 밝혀내려 했다면 아감벤은 법이 그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 어떤 예외적 상태에 주목하고, 그 속에서 권력의 본질을 포착하려고 했다’고 분석했다(〈문학과 사회〉 2004년 가을호, 김태환, ‘예외성의 철학-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통치권력과 벌거숭이 삶〉’).

"아우슈비츠를 절대악의 자리로 밀쳐내지 마라"

김씨의 분석대로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즉 ‘벌거벗은 생명’이란 표면 말뜻과 달리 진정한 자연 상태의 인간이 아니라 근대 주권자가 만들어낸 존재이다. 둘의 관계를 규정하면서 아감벤은 독일의 법철학자 카를 슈미트의 주권 개념에 줄을 댄다. 카를 슈미트에 따르면 주권자는, 법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예외 상태, 즉 비상상태를 선포할 수 있는 자이다. 이런 카를 슈미트의 테제는, 아감벤에 이르러 주권은 누가 호모 사케르인지를 결정할 만한 권력이라는 것으로 변주된다.

보호받아야 할 보편 삶과 그렇지 않은 예외 삶 사이의 경계를 정하는 것, 그것이 주권이라는 것이다. 김태환씨는 아감벤에게 기대어 이렇게 의미를 확장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주권자에게 사람들은 모두 ‘호모 사케르’이고, 호모 사케르로 낙인찍혀 공동체에서 추방당한 사람에게는 모든 타인이 주권자이다.”

ⓒAP Photo관타나모 수용소.
‘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을 끄집어낼 때, 아감벤의 포부는 야심차다. 그는 푸코를 언급하면서 병원과 감옥의 ‘대감금’의 재구성에서 시작된 푸코의 연구가 수용소에 대한 분석으로 나아가지 않았는지 의아해한다. 전체주의 국가에 대한 성찰이 돋보이는 한나 아렌트에 관해서는 통찰력 있는 분석에도 불구하고 생명 정치의 관점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고 꼬집는다. 그는 “두 사람의 관점을 벌거벗은 생명, 즉 ‘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을 통해 결합시켜보겠다”라고 선언하고 나섰다.

아감벤의 질문은, 유럽에 많은 불편함을 야기했다. 이를테면 그는 ‘20세기에 의회 민주주의 국가가 그토록 신속하게 전체주의 국가로 변모하고, 또 전체주의 나라가 오늘날 거의 아무런 단절도 없이 신속하게 다시 의회민주주의 국가로 되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냐’고 묻는다. 또 세르비아의 인종 청소에서 볼 수 있듯이 옛 공산권 국가의 지배계급이 가장 극단의 인종 차별주의자로 전락하거나 유럽에서 새로운 형태의 파시즘이 재생한 현상에 착목하고 그 이유를 분석하는 데 골몰한다. 현대 사회에서 입 달린 이들은 누구나 전체주의에 혐오감을 표시하는데 사실 민주주의와 전체주의가 기이한 인접성을 갖는다는 암시인 셈이다. 

그에게 난민과 수용소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범법자와 감옥이 아니다). 그들이야말로 근대 국가의 정체를 드러내는 존재라고 본다. 우선 그는 1789년 인권선언문의 성격을 분석한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라는 제목을 단 인권선언은 ‘인간은 자유롭게, 그리고 권리에서 평등하게 태어나고 존재한다’고 선포한다. 출생 그 자체가 권리의 원천이자 담지자로 등장한다.

ⓒAP Photo아감벤이 1990년대 중·후반 〈호모 사케르〉 시리즈에서 보여준 수용소의 본질에 관한 통찰은, 이후 관타나모 수용소와 아부그라이브의 참상(사진)이개되면서 더욱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실제는 어떤가. 한 인간이 갖는 권리는, 오로지 특정 국가 시민의 권리 속에서만 보전된다. 그런 경향은 점점 더 강화된다. 국적을 잃은, 시민권 없는 이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생각해보면 그 괴리가 극명하다. 이제 인권은, 국민으로서 혹은 시민으로서 권리가 온전하지 않은 자를 위해서만 불려나온다. 아감벤이 난민, 즉 시민이 아닌 자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까닭도 바로 그것이다. 아감벤은 난민은 인간과 시민, 즉 출생과 국적 간의 연속성을 깨뜨림으로써 근대 주권의 근원적 허구성을 드러낸다고 본다.

유럽에서 이런 상황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적나라해졌다. 난민과 무국적자가 급증하면서 많은 유럽 국가는 앞다투어 국적 박탈과 귀화 철회를 가능케 하는 법령을 도입했다. 한 국가가 보호할 인간, 즉 시민과 시민 아닌 자의 경계를 명확히 하려는 시도였던 셈이다. 1915년 프랑스에 이어, 벨기에는 전쟁 기간에 반국가 행위를 저지른 시민의 귀화를 철회하는 법을 만들었다. 그 정점은 사람을 완전한 권리를 보유한 시민과 2등 시민으로 구분한 독일의 뉘른베르크 법이다. 시민권의 전제로서 의미를 가졌던 인권은 점점 시민권과 분리되었다. 이제 국제기구와 개별 국가는 ‘인간의 신성불가침한 권리’를 엄숙히 선언하곤 하지만 난민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지극히 무능하다.

아감벤은 수용소와 관련해서도 질문을 바꿔야 한다고 주문한다. ‘어떻게 이토록 잔인한 범죄들이 인류를 대상으로 자행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은 위선적이라는 것. 누구든 수용소에 오는 사람은 합법과 불법이 구별되지 않는 지역으로 들어서는 것이고, 그곳에서 개인의 권리나 법적 보호라는 개념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떻게 모든 법이 멈추는 곳, 그런 장소와 제도를 만드는 것이 가능했나’를 물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말한다. “수용소에서 잔혹한 일이 벌어질 것인지 아닌지는 그 시점에 주권자로 행세하는 경찰의 예의바름과 윤리 감각에 전적으로 달렸다.”

ⓒ뉴시스한국의 연구자들은, 사회에서 배제된 미등록 이주노동자야말로 한국 사회의 ‘호모 사케르’라고 말해왔다.
지난 2004년 전세계 사람은 아부그래이브 수용소에서 이라크인이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우연히 폭로된 사진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그 사태에 관한 미국의 태도도 목도했다. 럼스펠드는, 약간 유감을 표했으나 테러와의 전쟁, 혹은 악의 제거라는 명분으로 인권 유린을 정당화했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첫 권이 쓰여진 것은 1995년. 아부그래이브의 참상이 벌어진 것은 그 이후이지만, 아감벤의 지적은 마치 그런 사태를 예견한 것처럼 존재감을 갖게 되었다. 

아감벤은 역사 속에 존재했던 숱한 수용소를 통해 그런 통찰에 도달한다. 이를테면 1991년 이탈리아 경찰이 알바니아 불법 이민자를 본국으로 송환하기 전에 임시로 수용했던 바리의 축구 경기장, 바이마르 정부가 동유럽 출신 유대인 피난민을 집결시켰던 코트부르-질로프의 외국인 집단 수용소, 심지어 프랑스의 국제 공항 내에 난민 지위를 인정받기를 희망하는 외국인을 억류하는 곳인 대기 구역 또한 수용소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외국인 보호소라는 이름의 감금 시설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상기해보면 그 의미가 명확해질 것이다.

수용소의 가장 극단 형태는 아우슈비츠였다. 그런데 아감벤은 그에 대해서도 불편한 발언을 해댄다. 아우슈비츠를 절대 악의 자리로 밀쳐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 아감벤은 유대인 학살에 대해 홀로코스트라는 이름으로 일종의 희생 제의적 아우라를 부여하려는 시도는 무책임한 일이라고 꼬집는다. ‘나치 치하의 유대인은, 호모 사케르의 명백한 사례이다. 희생자 본인들은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용기를 내어 희생 제의라는 베일로 가리지 말아야 하는 진실은, 유대인은 광기 어린 거대한 홀로코스트 속에서 말살된 것이 아니라, 히틀러가 직접 언급했듯이 마치 ‘머릿니’처럼, 달리 말해 벌거벗는 생명으로서 말살되었다는 점이다’(〈호모 사케르〉 231쪽).

이에 대해 김태환은 ‘나치라는 절대 악과 서구 민주주의 체제 사이에 질적인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듯한 아감벤의 태도가, 특히 나치 문제에 민감한 독일에서 많은 비판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한다. 아감벤은 첫 권에서 이미 독일의 수용소가 나치 체제 전에 세워졌음을 지적했다. 또  악명 높은 생체실험은 나치 체제뿐 아니라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판사 구실을 했던) 미국에서도 사형수와 장기수 등을 대상으로 버젓이 행해졌음을 환기시킨다.

기자명 노순동 기자 다른기사 보기 lazysoon@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