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 없는 박물관의 ‘위엄’
  • 허태우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 편집장)
  • 호수 249
  • 승인 2012.06.30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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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톨드 갤러리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소규모 미술관으로 평가받는다. 마네·모네·고흐 등 미술사에 획을 그은 화가의 작품이 걸려 있는 전시실이 넋을 잃게 만든다.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소규모 미술관 중 한 곳.” 코톨드 갤러리(Courtauld Gallery)가 내세우는, 아주 적절한 홍보 문구다. 런던 스트랜드 가의 서머싯하우스(Somerset House)에 자리 잡은 이 미술관은 세계 최고의 인상주의 컬렉션으로 정평이 나 있다.

2011년 초, 나는 거의 30년을 벼른 끝에 이곳을 방문하고야 말았는데, 이유는 단 하나. 르누아르의 작품 〈관람석〉을 직접 감상하기 위해서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우연히 보았던 문고판 화집에 실린 그 작품을 보고 단번에 마음을 빼앗긴 경험이 있다. 사랑 따윈 모를 나이, 작품에 반했는지 혹은 그 속에 등장하는 여인에 반했는지 돌이켜보면 어처구니없지만 말이다. 물론 설익은 욕망의 대상은 얼마 후 배우 소피 마르소와 피비 케이츠로 옮겨갔다.

트래펄가 광장에서 출발해 템스 강을 따라 이어진 스트랜드 가를 따라 5분 정도 걸어가면 서머싯하우스에 다다른다. 이곳은 1775년 윌리엄 체임버스가 왕립학회를 위해 팔라디오 양식으로 설계한 건물이다. 귀족스러운 분위기를 한껏 뽐내며, 분수 55개가 설치된 넓은 중정도 눈길을 끈다. 겨울에는 이 중정이 스케이트장으로 변신하기 때문에 런던 사람들의 레저 생활에도 일조한다.

코톨드 갤러리가 있는 서머싯하우스 전경.

서머싯하우스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에 있는 작은 문이 코톨드 갤러리의 입구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무심코 지나칠 확률이 100%. 이목을 끄는 간판 따위가 없기 때문이다. 작품으로 승부한다는 은근한 자부심이 배어 있는 듯하다.

코톨드 갤러리는 어떤 곳인가. 르네상스부터 20세기에 이르는 회화, 드로잉, 판화, 조각 작품을 소장한 갤러리로 1932년 개관했다. 마네,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드가, 쇠라, 세잔, 고흐, 고갱 등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거장 컬렉션이 주는 임팩트는 파리 오르셰 미술관의 그것에 버금갈 정도다. 인상주의 외에도 보티첼리, 반다이크, 루벤스, 고야, 칸딘스키, 코코슈카 등 대가의 작품도 소장하고 있다. 전체 소장품 수는 회화 530점, 드로잉과 판화 2만6000여 점에 이른다. 더 놀라운 점은 이것이 대부분 컬렉터의 기증품이고, 이 갤러리가 코톨드 미술연구소의 부속 기관이라는 것이다.

나를 울린 르누아르

영국 내 미술 전문 연구소의 필요성에 공감하던 새뮤얼 코톨드, 리 자작 그리고 로버트 위트 경. 이렇게 3명은 연구소 설립을 위해 각자의 미술 컬렉션을 기증하고 경제적·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해 코톨드 미술연구소를 세우게 된다. 당시 섬유업으로 부를 축적한 코톨드가 기증한 작품 수와 작품 수준이 결정적 구실을 했기 때문에 연구소와 갤러리의 명칭을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 그들의 바람대로 이제 연구소는 자타가 공인하는 영국 최고의 미술사 교육기관으로 자리를 잡았고 갤러리는 지구상 가장 훌륭한 소규모 미술관이 되었다.

인상주의가 낳은 걸작인 르누아르의 〈관람석〉.
드디어 나는 자부심이 배어 있는 입구를 지나쳐 미술관의 우아한 계단을 올라가 인상주의 작품을 전시한 층에 다다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거의 25년 동안 〈관람석〉을 시카고 미술관이 소장한 줄 알았다. 애초에 잘못된 정보를 접한 것이다. 그러니 코톨드 갤러리에 가겠다고 벼른 것은 5년 정도로 수정하자. 여하튼 첫 번째 전시실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오른쪽에 떡하니, 홀로, 여봐란 듯이 그 작품이 걸려 있는 게 아닌가(지금은 그때와 달리 작품이 걸린 장소가 바뀌었다).

어찌나 놀랍던지 온몸은 그 자리에서 10초쯤 정지했고, 10초 후 눈물도 찔끔 나왔다. 그리고 10분 넘게 작품에 빠져들었다. 그때, 전시실을 지키던 한 도슨트(관람객들에게 전시물을 설명하는 안내인)가 얼이 빠져 있는 나에게 말했다. “아름답죠? 저 안으로 들어가면 더 놀라운 게 많아요.”

사실이었다. 전시실에는 마네의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고흐의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드가의 〈무대 위의 두 무희〉, 세잔의 〈생트 빅투아르 산〉 등 미술사에 획을 그은 작품이 부지기수로 걸려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내 욕망의 대상은 이 작품에서 저 작품으로, 수시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뀌었다. 작품들이 마음을 빼앗아가는 대로 그저 놓아둘 뿐이었다. 바로 코톨드 갤러리 안에서만은 말이다.

고흐의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아래)도 코톨드 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다.
✚ 코톨드 갤러리
관람 시간 10:00~18:00, 입장료 6파운드(약 1만800원, 매주 월요일 10:00~14:00는 무료), www.courtauld.ac.uk

✚ 머물 곳 - 원 알드위치(One Aldwich)
한때 신문사 사무실로 쓰인 이 고급 호텔은 객실 105개를 갖추고 있으며, 실내 곳곳에 현대미술 작품을 전시해놓았다. 스위트에서는 스트랜드 가와 워털루 다리의 환상적인 전망을 볼 수 있다. 지하철 코벤트가든 역이나 채어링크로스 역 하차, +44 20 7300 1000, www.onealdwych.co.uk

✚ 먹을 곳 - 벤스 쿠키스(Ben’s Cookies)

런던 최고의 쿠키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트리플 초콜릿, 땅콩버터, 오트밀, 건포도 등 18종류의 쿠키를 고를 수 있다. 종일 직접 신선한 쿠키를 구워낸다. 지하철 코벤트가든 역 하차, www.benscookies.com

✚ 볼 곳 - 블룸스버리(Bloomsbury)
영국 문학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버트런드 러셀, 버지니아 울프, 에드워드 포스터, 윌리엄 예이츠, 찰스 디킨스 등이 이 지역에 거주했고, 한때 ‘블룸스버리 그룹’이라는 문학·예술인 집단의 활동 무대였다. 고든 광장과 베드퍼드 광장에서 당신의 분위기를 느껴보자. 토트넘 코트로드 역 하차.

✚ 즐길 곳 - 프렌치 하우스(French House)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술집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드골도 자주 들렀다고 한다. 딜런 토머스, 피터 오툴, 프랜시스 베이컨 등의 문화 예술인도 이곳의 단골이었다. 피카달리 서커스 역 하차, www.frenchhousesoh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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