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나 다를까, 올해도 1위라고 한다. 덴마크 이야기다. 지난 4월 여론조사 전문회사 갤럽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실시한 삶에 대한 주관적 행복도 조사에서 덴마크는 또다시 1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156개국 중 56위. 하지만 이 조사는 전쟁 상태에 있는 중동이나 아프리카 국가까지 포함하는 것이어서, 조사 대상과 방법에 따라 우리나라는 최하위권으로 곧잘 밀려나곤 한다. 이 뉴스를 접한 필자가 가장 먼저 한 것은, 벽장 속에 있던 아콰빗(Akvavit) 병을 꺼내들어 한잔 들이켠 것이다. 그들의 행복에 배아파하는 나의 좁디좁은 속을, 그들의 행복이 깃든 맛으로 달래기 위해서.


그들의 행복 앞에서 나는 왜 불행했을까

2010년 가을, 다큐멘터리 〈KBS 스페셜-행복해지는 법〉 취재를 위해 찾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필자는 ‘멘붕(멘탈 붕괴)의 연속’과도 같은 나날을 보냈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나라를 찾아 그 비결을 알아보기 위한 취재였는데, 처음 도착했을 때만 해도 ‘어디 얼마나 행복하신지, 그 이면을 들춰내주지’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뭐든 완벽해 보이는 것이 있다면, 여기저기 들쑤셔서 그 껍데기 아래에 존재하는 본질을 드러내고 싶은 것이 PD로서의 본능 같은 것이니까.

 

ⓒ탁재형 제공코펜하겐 중앙역 뒤에서 4대째 영업 중인 ‘예른바네’ 바의 모습.

 

 


그런데 어라, 이 인간들! 진짜로 행복한 거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너무너무 재미있어하고(심지어 초등학교까지는 시험조차 치르지 않는다), 미장과 목수일을 배우는 직업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보다는 그 일이 주는 순수한 즐거움 그리고 국가라는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이야기한다. 그들이 행복하다는 것을 발견할수록 나의 불행은 커지는 느낌이었다. 제작비 절감을 위해 다른 프로그램을 마치자마자 혈혈단신 덴마크로 건너온 고독감과 피로,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몸에 익은 ‘세상 만만하지 않다’는 가치관이 붕괴되는 데에서 오는 당혹감이 나를 더욱 불행하다고 느끼게 만들었던 것 같다.

결국 나는 밤마다 코펜하겐 중앙역 뒤의 바를 찾아 익숙한 방법으로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한잔 술을 들이켜며, 와이파이의 세상 속으로 달아나는 방식으로. 마지막 날 밤, 그때까지는 덴마크 맥주인 칼스버그(Carlsberg)와 투보그(Tuborg)만 줄창 마셔댄 터라 뭔가 이 씁쓸하고 쓸쓸했던 덴마크 취재를 기억나게 해줄 만한 술을 한잔 마셔보기로 했다. 어느 정도 얼굴이 익은 바텐더에게 덴마크의 대표적인 술을 청하자, 그가 따라준 것이 아콰빗이었다.

아콰빗의 어원은 라틴어 ‘아쿠아 비타이(Aqua Vitae)’, 즉 ‘생명의 물’이다. 이는 각국의 술이 분화되기 이전 유럽의 증류주를 통칭하던 말로, 영국의 위스키(Whisky), 프랑스의 오드비(Eau de vie) 등이 모두 이 단어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명칭상 아쿠아 비타이의 적자인 아콰빗은 유럽 중심부가 아닌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 등 스칸디나비아 반도 전역에서 공통적으로 즐기는 술이다. 

 

 

 

 

 

 

 

ⓒ탁재형-제공덴마크 아콰빗인 ‘알보르그’.

 

 

전 세계 행복도 조사를 해보면 이들 나라가 항상 5위 내지는 10위권 안에 드니, 이 술을 마시면 행복해진다고는 말할 수 없어도 이 술을 마시는 인간들이 무척 행복한 사람이라는 명제는 성립한다. 도대체 이 행복한 인간들이 행복한 순간에 맛보는 술은 어떤 것인지, 여전히 시큰둥한 기분으로 술잔을 들어올렸다. 잔에 담긴 아주 옅은 호박색 액체는 고농도 알코올 특유의 묵직한 질감을 보여주며 넘실대고 있었다.


척박한 재료로 만든 술에 아기자기한 향기

“스콜(Skoal).”

적의 목을 들어올리는 바이킹처럼 사뭇 비장한 어조로 바텐더에게 덴마크식 건배를 건네고(실제로 ‘스콜’은 적의 두개골(Skull)에 술을 담아 마시던 바이킹의 제의 풍습에서 유래한 건배사라고 한다), 입에 털어넣은 아콰빗이 ‘음… 쓰다’고 느끼는 순간, 입 안에서 꽃이 피어났다.

캐러웨이(Caraway), 카다멈(Cardamom), 아니스(Anise), 회향 같은 허브와 오렌지 껍질이 조화된 향기가, 피오르의 산들바람 같은 청량함을 던지며 한바탕 가슴을 쓸고 내려갔다. 종종 이야기하지만, 그 나라의 술, 그중에서도 증류주를 마시는 체험은 나에게 그 민족의 DNA 데이터베이스에 직접 접속하는 것과 같은 체험을 선사한다. 한 잔의 아콰빗이 나에게 선사한 데인(Dane·덴마크 사람)들의 이미지는 척박한 토양 위에 필사적으로 꽃밭을 가꾸는, 손이 날랜 것만큼이나 재담에도 능한 농부의 그것이었다.

 

 

 

 

 

 

 

ⓒ탁재형-제공직업학교 학생이 가구 일을 배우고 있다.

 

 

아콰빗은 러시아의 보드카처럼 감자로 만드는 술이다. 감자를 증류한 원주를 먹어보지 못했기에 확실히 말할 수는 없으나, 그 자체로 맛이 썩 훌륭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 상태 그대로 마시는 경우는 (적어도 각국의 이름난 술 중에서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러시아 사람들의 경우에는 숯을 이용해 모든 냄새를 지워버리는 길을 택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탱크로 밀어버리는 대륙적인 기백이랄까. 하지만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은 척박한 토양에서 얻은 척박한 재료로 만든 술 위에, 놀랍도록 아기자기하고 발랄한 향기를 입히는 쪽을 선택했다. 그 결과 아콰빗은 길고 긴 북유럽의 겨울밤이 주는 우울함을 단번에 날려버리는 상큼 발랄한 술이 되었다. 아마도 시작부터 자신들의 땅에선 잘 자라지도 않는 포도 따위로 술을 만드는 것에 집착했다면,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세계 최고의 아콰빗 생산지가 아니라 시시한 3류 와인 생산지로 알려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스콜!”

다시 한 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나는 생각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재료가 감자뿐이라서, 또는 쌓아올린 스펙이 별 볼 일 없다 해서, 가지고 있는 재산이 쥐꼬리만 하다 해서 실망하긴 아직 이르지 않은가. 자신이 가진 주재료 위에 덧입혀서 완벽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향기는, 세상 어딘가에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기자명 탁재형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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