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구현, 효율적으로 하면 안 되나
  • 김지홍 (법무법인 지평 변호사)
  • 호수 24
  • 승인 2008.02.26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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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는 여러 차례 플리바게닝(형량 협상제) 도입 시도가 성공하지 못했다. 진실과 정의에 대한 지나친 고집이 오히려 인력과 자원 부족으로 많은 범죄를 놓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 법 관념과 사법제도를 되
   
 
김지홍
국내에서는 여러 차례 플리바게닝(형량 협상제) 도입 시도가 성공하지 못했다. 진실과 정의에 대한 지나친 고집이 오히려 인력과 자원 부족으로 많은 범죄를 놓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 법 관념과 사법제도를 되돌아볼 때다.
 
 
최근 미국 법원은 김경준씨의 누나 에리카 김 씨에게 유죄 판결을 선고했는데, 에리카 김이 BBK 주가조작 등에 적극 개입한 혐의는 아예 기소조차 하지 않았다. 에리카 김이 일부 혐의 사실에 유죄를 인정하고 관련 벌금과 세금을 모두 납부하는 대신, 미국 검찰이 나머지 여덟 가지 혐의 사실을 기소하지 않고 구형량도 낮춰주기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최대 징역 80년까지 선고받을 수 있었던 에리카 김은 보호관찰 3년, 자택연금 6개월 처분에 그쳤다.

미국에서는 90%가 넘는 형사 사건이 이렇게 검찰과 피고인의 협의에 의해 처리된다. 이를 ‘플리바게닝’이라 하는데, 혐의가 인정되는 사건은 신속하게 처리하고 혐의를 부인하는 극소수 사건에만 수사와 재판을 집중하겠다는 취지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플리바게닝 제도를 도입하자는 논의가 여러 차례 있었으나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국민의 법 감정에 반한다는 것이 가장 큰 까닭이었다. 범죄 혐의가 있으면 철저히 수사해서 처벌을 해야지, 범죄자와 협상을 통해 일부 범죄를 묵인해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법대로’ 외치다 가산 탕진까지

플리바게닝에 대한 이러한 인식 차이는 무엇이 ‘정의’이고, 정의는 어떻게 달성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한국인과 미국인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정의와 효율을 엄격히 구분해 정의를 세우는 사법 집행 과정에 기업에서나 따지는 효율·이해득실을 고려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반면 미국인은 정의와 수익을 똑같이 이뤄야 할 목표라고 보기 때문에 목표 달성에 가장 효율적이고 신속·저렴한 방법을 찾고자 한다.

   
 
ⓒ미주 한국일보
에리카 김 씨(맨 오른쪽)가 보호관찰 3년 등 낮은 형량을 받은 것은 검찰과 협상이 가능한 미국의 사법제도 때문이다.
 
 

이같은 차이는 형사 사건뿐만 아니라 민사 사건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미국의 민사 소송은 90% 이상이 화해로 종결되고 겨우 5%만이 판결로 간다. 미국인은 분쟁 발생 직후는 물론이고, 소송을 진행하는 도중에도 계속 화해를 시도한다. 이는 패소를 예상해서가 아니라,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누리려는 합리적 활동으로 판단된다. 소송 비용이 워낙 많이 드는 탓도 있지만, 결과가 불확실한 판결보다 서로 금액만 맞으면 적정한 선에서 확실한 금액으로 합의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반면 우리나라의 민사 분쟁은 법원의 문턱을 넘기가 힘들지, 일단 넘으면 대법원까지 가는 것이 보통이다. 2006년 <사법연감>에 따르면, 민사합의부가 심리한 1심 사건의 40.5%가 고등법원에 항소되었고, 고등법원 판결 중 39.8%가 대법원에 상고되었다. 일단 ‘법대로 하자’가 되면, 법대로 하는 데 드는 비용과 노력은 큰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둘 중 어느 하나가 옳고 다른 하나가 틀리다는 것은 아니다. 진실과 정의에 대한 지나친 고집이 자칫 시간과 비용만 많이 들이고 정작 진실과 정의마저 세울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우리의 법 관념과 사법제도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범죄를 모두 처벌하려다 인력과 자원 부족으로 많은 범죄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느님만이 정확히 판단할 문제를 법관 앞에서 심판받으려다가 가산마저 탕진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 외부 필자의 기고는 <시사IN>의 편집 방침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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