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6일 CJ 이재현 회장의 운전기사 김 아무개씨(44)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검은색 자동차 몇 대가 김씨가 운전하는 차를 맴돌았다. 다음 날 CJ 비서실이 서울 장충동 이 회장 자택 주변 폐쇄회로 텔레비전(CCTV) 영상을 분석해보니 2월15일부터 수상한 자동차 몇 대가 나타났다. 2월15일은 CJ 이 회장의 아버지인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81)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70)에게 아버지 유산으로 인정된 차명 주식을 돌려달라고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소송을 낸 바로 다음 날이었다. 이맹희씨는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장남으로, 3남 이건희씨에게는 열한 살 터울의 형이다.

CJ 비서실은 5일간 낯선 차량들의 미행을 지켜보다가 2월21일 결정적 증거를 포착했다. 이날 저녁 7시30분 이 회장 승용차가 일부러 평소와 다른 방향으로 집을 나섰다. 그러자 검은색 그랜저 렌터카 한 대가 따라붙었다. 이날 오후 4시부터 이 회장 자택 인근을 맴돌던 차량이었다. 운전자가 평소 오피러스 승용차를 몰고 주변을 맴돌던 인물임도 확인했다.

삼성 측 “우연에 불과하다”

이날 저녁, 미행이라는 확신이 들자 CJ 직원들이 그랜저 승용차를 막았다. 승강이를 벌이던 과정에서 직원 한 명이 그랜저에 무릎을 부상당했다. 운전자가 무리하게 자리를 뜨려다 벌어진 사고였다. 운전자는 경찰 조사에서 이름과 주민번호만 말한 채 근무지를 밝히지 않았다. CJ는 렌터카 차량 조회 등을 통해 2월22일 운전자가 삼성물산 감사팀에 다니는 김 아무개 차장(42)임을 밝혀내고 다음 날 서울 중부경찰서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피고소인은 성명불상자로 처리했다. 이에 대해 CJ 홍보실은 “김 차장 외에도 의심 가는 승용차와 인물이 더 있었기 때문에 피고소인을 별도로 기재하지 않았다. 경찰 조사에서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CJ 제공삼성물산 차장이 탄 그랜저 승용차가 서울 장충동 CJ 이재현 회장 자택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다.

CJ가 공식 사과를 요구했지만 삼성물산과 삼성그룹은 공식적 대응을 하지 않았다. 삼성물산 홍보 관계자가 ‘김 차장이 감사팀 업무 차원에서 신라호텔 일대를 출입했을 뿐’이라고 말했을 따름이다. 감사팀 업무에 부지 사업성 검토가 포함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삼성물산의 한 관계자는 〈시사IN〉과 통화에서 “김 차장이 장충동을 첫 방문한 시점이 2월14일 이후인 것은 우연에 불과하다. (삼성 일가 소유지의) 번지수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신라호텔로 가려면 동선상 CJ 이 회장의 자택을 지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회장의 자택은 신라호텔 건너편 주택가 안쪽에 있다. 김 차장의 집이 장충동인 것도 아니다. 굳이 밤늦은 시간까지 이재현 회장 주변을 맴돌아야 하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삼성은 미행으로 얻을 게 없다고 말한다. 삼성의 미행·감시가 문제가 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5년에도 삼성은 이재현씨의 동향을 CCTV로 감시하다가 적발됐다. 2003년 7월부터 약 1년간 삼성SDI 직원이 20여 명이나 불법으로 위치를 추적당한 일도 있었다. 당시 피해자들은 삼성SDI에서 일했던 전·현직 직원으로 노조를 만들려던 중이었다. 2004년 8월 피해자들은 삼성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앞서 7월에는 두 차례에 걸쳐 서울중앙지검에 고소장도 접수했다. 그러나 경영진의 회유와 협박으로 강 아무개씨를 제외한 피해자 전원이 고소를 취하했다. 유일하게 고소 취하를 거부했던 강씨는 삼성으로부터 협박과 탄압에 시달려야 했다.


ⓒ삼성노조 제공지난해 삼성노조원 모임 장소 근처에서 발견된 미행 의심 차량의 모습

2005년 ‘안기부 X파일’을 공개해 삼성의 불법 정치자금을 폭로했던 노회찬씨도 ‘불법 도청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삼성이야말로 미행과 도청의 원조’라고 비판했다. 2007년 삼성 비자금을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의 미행 때문에 당시 집에도 못 가고 호텔을 전전했다. 김 변호사가 삼성 재직 당시 감시했다는 강부찬씨는 미국에서 미행을 당하다가 현지 경찰에 이를 신고하기도 했다. 경찰이 검거한 사람은 삼성이 고용한 사설탐정이었다.

지난해 삼성노조를 만든 조장희 삼성노조 부위원장도 노조를 만드는 동안 상시적인 미행과 감시를 당했다. 조 부위원장은 “지금도 기자회견을 할 때는 물론이고 어딘가를 갈 때마다 따라다니는 차가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삼성에 미행 매뉴얼이 있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CJ가 당한 방식이 삼성노조가 당한 방식과 비슷하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주진우·허은선 기자 다른기사 보기 ac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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