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어는 전라도이다. 홍어는 전라도 음식을 대표하는 것을 넘어, 전라도 사람을 상징하기까지 한다. 전라도 사람을 비꼬기 위해 홍어를 들먹이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그러라고 하면 된다. 그건 그들의 도덕적 수준 문제이지 전라도 사람의 식성 문제가 아니다. ‘전라도 홍어’ 소리에 기분 상한다고 ‘경상도 과메기’니 ‘경상도 돔배기’니 하는 말은 하지 마시라. 똑같은 놈이 될 뿐이다.

나는 경상도 마산(지금은 창원통합시가 되었다)에서 나고 자랐다. 마산에도 홍어가 있는데, 꾸덕하게 말린 것을 굽거나 쪄서 먹었다. 잔칫날에는 무침을 해서 내놓는 집도 있었다. 그때에도 전라도 홍어에 대한 말들이 돌았다. 홍어구이, 홍어찜, 홍어무침을 먹으며 이런 말을 했다. “전라도에서는 홍어를 두엄에 넣어 삭혀 먹는다며? 그걸 어떻게 먹냐?”

내가 전라도식 삭힌 홍어를 처음 먹은 것은 1980년대 말이었다. 광화문 근처에서 밥벌이를 할 때이다. 직장 선배 중에 광주 출신이 있었다. 그는 이 세상이 자신에게 맞지 않다고 여겨 보통의 삶에 별 흥미가 없었다. 늘 술을 입에 달고 있었다. 내 세상도 그의 것과 비슷했고, 그래서 그 선배와 술자리를 함께하는 날이 많았다. 그때에 선배가 나를 데리고 가던 홍어집이 있었다. 광화문네거리에서 정동고개로 올라가는 왼쪽 골목에 있는 허름한 식당이었다. 간판도 없었다. 너절한 실내에는 삭힌 홍어 냄새가 가득했다. 홍어회 한 점에 소주 한 잔 마시며 나는 선배의 전라도 이야기를 들었다. 전라도의 고통과 정서를 그렇게 눈물 핑 도는 삭힌 홍어와 함께 먹었다. 그때부터 홍어를 먹을 때면 나는 전라도라고 여긴다. 나도 홍어이다.


ⓒ황교익 제공신길동 홍어 골목에 있는 한 식당의 홍어 삼합 상차림. 역시 막걸리가 있어야 한다.

홍어는 한때 한반도에서 조기 다음으로 중요한 생선이었다. 어획량이 상당해 온 민족이 즐겨 먹었다. 특히 황해에서 많이 잡히니 황해도·서울과 경기·충남·전북·전남 지역에서 흔히 먹었다. 홍어는 자연히 삭기도 하지만, 한반도에서의 홍어 어획 시기를 보면 삭은 홍어를 먹는 일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홍어는 겨울과 이른 봄 사이에 잡히고, 따라서 이때의 날씨에는 바깥에 두어도 쉽게 삭지 않는다.


왜 전라도에서 홍어를 많이 먹었을까

전라도에서 삭힌 홍어를 즐겨 먹게 된 것은 날씨 때문일 것이다. 전라도, 특히 전라남도 해안지방은 겨울에도 풀이 자랄 만큼 따뜻하다. 이른 봄에 잡은 홍어이면 바깥에 두어도 쉬 삭을 것이다. 홍어가 삭는 것은 홍어의 표피에 있는 요소 때문인데, 적당한 온도에 이르면 암모니아 발효가 일어난다. 이 암모니아 발효를 두고 삭는다고 하는 것이다. 암모니아 발효는 맛을 변화시키는 것 외에 보존 기능도 한다. 암모니아가 잡균의 증식을 막아 썩지 않게 하는 것이다. 삭힌 홍어는 경상도의 과메기나 돔배기처럼 자연에 적응해 먹을거리를 오래 보관하는 방법에서 나온 음식인 것이다.

ⓒ황교익 제공신길동 홍어 골목. 서울의 고급 홍어 전문점들과는 달리 간판 어디에도 ‘남도 이미지’를 읽을 수 없다.

조선시대 한양 사람들은 홍어를 많이 먹었다. 인천 앞바다에서 홍어가 많이 잡혔기 때문이다. 홍어 어장의 사정은 요즘도 비슷한데, 대청도 근해가 홍어 주산지이다. 그러니까 전라도 앞바다에서 홍어가 많이 잡히고, 그래서 전라도 사람이 홍어를 많이 먹는다고 여기는 것은 착각이다. 현재 전라도에서 유통되는 상당량의 홍어는 인천 앞바다에서 난 것이다. 한양 사람은 겨울에서 이른 봄 사이에는 싱싱한(삭히지 않은 것이라 싱싱하다 했을 뿐이다) 홍어를 먹었을 것이고 그 외 계절에는 바싹 말린 홍어를 먹었을 것이다. 겨울에 홍어를 바깥에 걸어두면 얼었다 녹았다 하며 마르게 되는데, 이를 물에 불려 찌거나 구워 먹었을 것이다. 내륙지방의 재래시장에 가면 이렇게 말린 홍어를 지금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서울에서 전라도식 삭힌 홍어를 먹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로 보인다. 조선이 망하자 한양의 성곽은 무너졌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전라도에서 온 사람들이 서울의 시장에서 그 흔한 홍어를 사다가 삭혀서 먹었을 것이란 추측은 쉽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식당에서 내놓고 파는 일은 금방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라남도 해안의 따뜻한 지방에서 살던 사람들이 먹는 ‘특별난 음식’이 서울에서 일정한 수요를 창출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도 뒷골목의 선술집에서는 이 삭힌 홍어를 내는 집이 있었다. 1980년대 말 내가 처음 삭힌 홍어를 먹었던 광화문네거리 뒷골목 그 홍어집도 그때에 벌써 꽤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황교익 제공신길동 홍어집들은 옛날의 허름한 막걸리집 분위기를 띤다. 홍어 값도 싸다.

전라도는 한국 산업화의 ‘혜택’을 받지 못한 지역이다. 정치적인 배제도 작용했을 것이나, 평야가 넓은 농업 지역이라는 것이 특히 크게 영향을 끼쳤다. 1960~1970년대 대한민국 전체가 산업화의 길로 질주할 때 전라도는 그 산업화를 뒷받침하는 값싼 식량과 인력을 공급하는 기지로 눌러앉았다. 그즈음 전라도에 ‘전통 문화가 살아 있는 지역’이라는 위무의 수식어가 붙었고, 전라도 지역의 전통 문화를 남도 문화라는 이름으로 널리 소개했다. 남도민요, 남도소리, 남도굿, 남도놀이 같은 말이 그때에 만들어졌다. 1980년대에 들자 남도 음식이라는 말도 생겼다. 전라도 음식이 한반도에서 가장 예스럽고 전통적인 듯이 남도 음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다.

호사가들은 남도 음식의 특징으로 발효 음식을 꼽았고, 그 발효 음식 중에 삭힌 홍어가 절정의 발효 음식인 듯이 말하였다. 한국 음식을 알려면 남도 음식을 알아야 하고, 그 마지막에는 삭힌 홍어 맛을 알아야 하는 듯이 떠들었다. 일찌감치 서울의 여기저기 뒷골목에 포진하여 삭힌 홍어를 내는 식당들이 미식가입네 하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삭힌 홍어·신 김치·막걸리 이 셋을 함께 먹는 것을 삼합이라 하였다가 홍어·김치·돼지고기 이 셋을 함께 내는 것이 삼합으로 굳어졌다. 홍어회만 달랑 내는 것보다 삼합으로 내면 ‘요리’처럼 보인다. 한정식집에서 이 삼합을 고정 메뉴로 올리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의 일이다.


두 종류로 나뉜 홍어의 계급

남도 음식, 삼합이라는 이름과 함께 삭힌 홍어는 고급한 음식이 되었다. 1990년대 들어 황해의 홍어 어획량이 급격하게 줄면서 귀하기까지 했다. 1980년대부터 남미의 바다에서 홍어를 잡아 수입하던 수산업체들이 1990년대 들어 홍어 수입을 본격화했다. 그러면서 홍어는 두 종류의 음식으로 갈렸다. 비싸고 고급한 국내산 홍어와 싸고 서민적인 수입 홍어. 서울의 홍어가 그렇다.

영등포구 신길동에는 홍어집 10여 곳이 몰려 있는 골목이 있다. 1990년대 초에 한두 집 있던 것이 크게 번진 것이다. 가게들은 허름하고 음식 가격은 무척 싸다. 수입 홍어이기 때문이다. 전라도 특정 지역의 홍어임을 내세우면서 파는 고급 홍어집에 비해 절반의 절반 가격이다. 남도 음식이니 삼합이니 한국 발효 음식의 절정이니 하는 말이 돌기 전, 그러니까 홍어에 대해 ‘엉뚱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냥 먹었던 그때의 그 홍어가 이 신길동 서민의 골목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이다. 포장되고 위무되는 전라도가 아닌, 날것의 전라도가 이 신길동 골목에 있다.

기자명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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