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9·11 테러 이후의 세계〉(자음과모음 펴냄, 2011년)를 읽으려면 먼저 ‘실재(the real)’를 파악해야 한다. 현실성 내지 사실성을 뜻하는 명사 ‘리얼리티(reality)’에서 리얼(real)만 절단한 이 조어는, 법이나 언어가 배제하거나 그것에 포착되지 않는 현실의 이면을 가리킨다. 낮에는 가스나 짜장면 배달을 하는 모범 청년이 한밤만 되면 일산 자유로를 내달리는 폭주족이 되는 경우가 그렇다. 법과 언어가 배제한 폭주족(the real)은 거기에 종속된 모범적 배달부(reality)와 중첩되어 있지만, 그가 한밤에 오토바이를 끌고 나오지 않는 한은 파악되지 않는다.

현실과 중첩되어 있는 실재는, 사건이 되지 않으면 감지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종의 무의식과 같다. 2005년 문화방송(MBC)의 〈음악캠프〉에 출연했던 펑크 밴드 카우치가 그랬다. 생방송 중에 하반신 노출 해프닝을 벌인 그들은 곧바로 구속됐다. 하지만 모두가 성토했던 카우치 유의 장난은, 그들이 놀던 서울 홍대 앞 클럽에서 늘 벌어지는 것이었다. 문제의 핵심은 하반신 노출이 아니라, 법과 언어가 배제된 자리에 있던 그들을 상징계(법·언어)의 무대에 올린 것이다. 카우치가 서울 어느 구석에 현실의 일부로 엄연히 실재하고 있었던 것은 맞지만, 공중파 방송이 부르지 않았다면 시청자가 그들과 만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상징계로 진입한 순간, 시청자들은 ‘실재의 역습’에 치를 떨었다. ‘매복하다’라는 뜻을 내포한 카우치(couch)는, 우연치고는 너무나 안성맞춤으로 실재의 참모습을 설명했다.

 

ⓒ이지영 그림

 


실재의 전도사인 지젝은 할리우드의 B급 영화를 자기 철학의 숙주로 삼아왔다. 그가 진지한 예술 영화보다 범죄·재난·공상과학 영화를 선호하는 까닭은, B급 장르 영화가 예술 영화보다 더 현실의 이면인 실재를 잘 드러내준다고 여겨서다. 할리우드는 괜히 ‘꿈의 공장’이 된 게 아니다. 그들은 실재를 짚어내고, 그것을 집어내는 족집게다. 그래서 9·11 테러가 발생한 직후 미국 국방부는 테러 공격에 맞서 싸우고 테러와의 전쟁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할리우드에 재난 영화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들의 모임을 설립하도록 요청했다. 이 일화는 현실과 실재의 중첩을 드러내는 또 다른 보기다.

적어도 2001년 9월11일을 맞기 전까지, 미국인은 할리우드를 통해서만 실재와 만났다고 할 수 있다. 거리를 둔 안전한 볼거리에 불과했던 실재가 미국을 강습한 사건이 9·11이다. 하지만 그들은 실재와 만나고자 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제국의 상징물인 세계무역센터를 공격당한 미국인의 반응은 하나같았다. ‘왜 세계는 미국을 싫어하는 거죠?’ 그러면서 지구에 더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며, 그것을 이식하기 위한 두 개의 전쟁(아프가니스탄·이라크)을 벌였다. 이런 외설적 대응은, 자신들이 강요하는 자본주의가 곧 폭력이며, 그것을 관철하기 위해 집어드는 무기가 바로 민주주의였다는 것을 외면한다.

존 쿨리의 〈추악한 전쟁〉(이지북 펴냄, 2001년)은 9·11 발생 직전에 나온 책으로, 빈라덴과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지원을 받아 소련과 싸웠던 게릴라 부대였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있다. 즉 빈라덴과 탈레반은 이슬람 근본주의라는 악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제국주의의 과잉이 낳은 부산물이었다. 또 우리는 9·11 이후의 전개를 익히 알고 있는데,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심어주겠다는 명분이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인근의 군주국가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월가 점령과 촛불집회에서 춤추기? 

9·11은 미국인을 제3세계의 비참(실재)과 분리해주던 스크린을 걷어주었다. 그때 미국인은, “이미 많이 늦었지만 ‘이런 일은 여기서는 일어나면 안 돼!’라는 태도에서 ‘이런 일은 어디에서도 일어나면 안 돼!’라는 태도로 이행”해야 했고, 자신들 역시 제3세계의 ‘호모사케르(‘개 값’조차 못되는 존재)’가 되어야 했다. 그것이 9·11의 진정한 교훈이다. 하지만 미국인은 뉴스 채널을 통해 아무런 집도(아프가니스탄), 불법 무기 공장도(이라크) 없는 곳에 원격으로 투하되는 미사일을 보면서, 자신들의 실재 체험을 또 한번 스크린(브라운관)에 가두고, 볼거리로 축소시켰다.

지젝은 9·11 이후에 보여준 미국의 태도를 ‘실재로부터의 회피’라고 부른다. 한편 그는 가미카제식 공격의 주역이었던 알카에다를 ‘실재에 대한 열정’이라는 또 다른 논리로 비난한다. 지젝에게 실재란 현실과 붙어 있으면서 현실을 불완전하게 만드는 것일 뿐, 거기에 유토피아적 성격을 부여하지는 않았다. 반면 순교를 통해 실재와 직접 조우하려는 알카에다는 자신의 행동을 대타자(신)의 의도로 치환하고, 경험 자체를 물신화하는 도착에 빠졌다.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9·11 테러 이후의 세계〉슬라보예 지젝 지음자음과모음 펴냄

 

 

이 책이 공들여 비판한 것은 실재로부터의 회피인바, 지젝은 자본주의를 자유민주주의라고 오해하는 세계인들의 거개가 이런 정신병에 빠져 있다고 말한다. 지난봄, 영업정지를 당하기 하루 전날 부산저축은행에서 벌어진 임직원과 주요 고객의 불법 인출 사태는, 이른바 개인의 재산을 최대한도로 보호한다는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이 소시민과는 관련 없으며, 공공의 세금이 자본가의 쌈짓돈이라는 게 밝혀졌다. 하지만 우리는 그 문제를 금융제도의 사소한 관리 소홀로 넘어가고 싶지, 자본주의의 원천적 결함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눈을 가린 채 철로에 엎드리면, 달려오는 기차도 사라진다고 믿는 것이다.

지난 9월부터 미국인들은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고, 10월에는 지젝이 군중 앞에서 연설을 했다. 하지만 시위는 실패로 끝날 공산이 크다. 제국의 중심부에서는 혁명이 일어날 리 없다. 혁명은 미국이 자신의 자리를 중국에 내어주고 나서야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아직도 자본주의를 불완전하게 하는 실재와 대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은 대한민국 남자가 신병훈련소에서 자주 듣는 말이라지만, 그것은 어느덧 자본주의의 계율이 되었다. 실제로 2008년 서울에서 벌어졌던 촛불집회에서나 올해 일어난 뉴욕 시위에서, 많은 사람은 노래하고 춤추며 무제한의 ‘토크쇼’를 즐겼다. 바보인가? 실재로부터의 지능적 회피인가? 악명 높은 중죄인 교도소에 수감된 은행 강도 공범 다섯 명이 모여서 자신들이 실패한 원인을 따져보았다. 결론은, ‘진지하게 작전을 짜야 할 때 우리는 농담만 했다!’였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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