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언론은 유럽연합(EU) 주축국인 독일이 ‘그리스 살리기’에 나섰다고 대서특필하고 있다. EU 국가 중 그리스 지원에 가장 냉소적이던 독일 의회가 9월29일 유럽재정안정기금(ESEF)의 기능 및 대출 능력 확대(2500억 유로→4400억 유로)를 압도적 표 차이로 승인한 것이다. ESEF는 유로존(Euro Zone:유로화를 사용하는 17개국)의 금융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지난해 5월에 구성된 특별기구다. EU의 중앙은행인 유럽중앙은행(ECB)에는 회원국에 구제금융을 제공할 권한이 없다. 그래서 ESEF가 만들어졌고 이번에 그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이번 사건은 EU의 주축국인 독일이 금융위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고, 이에 따라 다음 날 미국·유럽 증시와 유로화 가치는 상승세를 탔다. 그리스 국채 가격도 폭등했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지난 9월 하순(20~30일)만큼 세계경제에 적신호가 집중적으로 나타난 시기는 없었다. 지난 9월20일 국제통화기금(IMF)이 발간한 〈세계경제 전망 보고서〉는 미국과 유로존이 2011~2012년 2% 이하 성장률을 나타낼 것으로 보는 등 선진국과 이머징마켓을 막론하고 예상 성장률을 하향 조정했다. 


ⓒAP Photo그리스 시민들이 9월27일 복지혜택 대폭 축소 등에 반대하며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튿날 나온 〈글로벌 금융안정성 보고서〉에서도 IMF는 “지난 몇 개월 동안 금융 리스크가 엄청나게 증가했다”라고 토로하면서, △미국의 신용등급 하락 △유럽 재정위기 악화 △경제성장률 하락 등을 그 원인으로 꼽았다.

이런 와중에 신용평가사는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의 신용등급을 강등했다. 그리스 은행 역시 무더기로 신용등급이 하향 조정되었는데, 이들 은행 중 일부는 프랑스 대형 은행이 오너다. 이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미국 최대의 매머드급 금융기관인 뱅크오브아메리카(BOA)·씨티그룹·웰스파고도 신용등급 강등을 면치 못했다는 것이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는 솔직히 말한다. “유럽에는 암운이 드리우고, 미국에는 거대한 불확실성이 있다. 이와 동시에 글로벌 차원에서 수요가 추락하고 있다.”


그리스, 긴축 통한 자력갱생은 불가능

이는 물론 그동안 세계경제의 동력 노릇을 해온 나라들이 거의 절망적인 국면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세계 각국 수출의 ‘블랙홀’이었던 미국은 공화당 ‘재정긴축 매파’들의 공세 때문에 정부지출 및 신산업 투자를 지속하기 어렵게 되었다. EU는 남유럽 재정위기의 여파로 전전긍긍하면서도 이에 ‘경기를 죽이는 해법’(긴축)으로 대응하고 있다. 강력한 추동력을 보여줬던 중국·인도마저 경제성장률이 지체되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에는 모든 선진국들이 재정·통화를 풀고 자국 통화가치를 내리지 않는 방법으로 그럭저럭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국제협력 시스템마저 최근 미국의 달러 가치 절하 정책과 EU의 내분에서 알 수 있듯이 거칠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혹시 독일 의회의 ‘ESEF 대출능력 확대 승인’으로 뭔가 세계경제 회복의 전기가 마련되는 것은 아닐까?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다. 설사 구제금융을 받는다고 해도 ‘그리스 위기’는 ‘바닥을 향한 질주’를 멈출 수 없다. 그 이유는 독일이 그리스를 살렸다는 9월29일, 그리스에 발생한 어떤 사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날 수도 아테네의 그리스 의회는 주변 도로를 시위 군중에게 점거당한 상태에서 ‘또 하나의’ 강도 높은 재정긴축 법안을 통과시키고 있었다. 이미 시행된 긴축 조치를 통해 그리스는 연금을 10% 삭감하고 공공 부문 노동자 임금을 30% 내린 바 있다. 그런데 9월29일 법안의 주요 내용은 연금 4% 추가 삭감, 공공 임금 20% 추가 인하 등이다. 공공 부문 노동자 수 역시 20% 줄이기로 했다. 이에 더해 크든 작든 부동산 소유자라면 연간 1000~1500유로를 더 내야 하는 특별세도 통과되었다. 특별세를 내지 않는 가구에는 전기 공급을 끊을 계획이다. 


ⓒAP Photo미국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9월26일 시위대 수백명이 ‘부자 증세’ ‘의료보험 지원’ 등을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리스의 민생은 2009년 말 긴축정책 이후 사실상 파탄 났다. 실업률 급등, 수요 폭락, 은행의 대출 기피 등으로 학교나 의료기관 같은 공공 서비스가 유명무실해지고 도시의 자영업자들 중 25% 정도가 영업을 포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빈민층에서는 물물교환이 이뤄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긴축을 더 강화하는 이유는 물론 ‘긴축 없이는 구제금융 없다’는, 트로이카(IMF·유럽위원회·유럽중앙은행의 3대 국제기구)의 압력 때문이다.

한마디로 ‘살림’을 최대한 축소하는 방법으로 빚 갚을 돈을 마련해서 채권자들을 안심시키라는 것이다. 정부지출 삭감으로 복지 혜택을 줄이고 세율을 인상하며 공무원을 대량 해고하면 그만큼 재정이 튼실해지지 않겠는가. 이런 조치에 힘입어 실업자가 거리에 넘치고 그만큼 임금 수준이 떨어지면, 그리스의 수출 경쟁력이 높아져 외채 상환에 필요한 돈을 빨리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긴축은, 그동안 ‘일 안 하고 정부재정을 낭비하며 살아온’ 그리스인들의 나쁜 버릇을 고치는 ‘시장의 처벌’이기도 하다. 이런 조치를 통해 그리스가 자력갱생하면서 EU 금융위기의 불씨를 제거하자는 것이 ‘트로이카’의 해법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스의 자력갱생이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는 관측이다. 무엇보다 그리스의 국가부채 규모는 GDP의 150%인 4500억 달러에 달한다. 연간 이자만 GDP의 8~10%에 달할 전망이다. 더욱이 긴축에 따른 신용 경색과 사회 혼란은 그리스 경제를 극도로 압박해서 GDP가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더욱이 그리스로서는 도저히 곤경에서 헤어날 수 없는 구조적 이유가 있다. 원화 가치를 내려서 수출을 촉진하는 한국 같은 나라와 달리 그리스는 유로화 가치를 조절할 수 없다. 그리스 중앙은행은 ECB의 일부일 뿐이며 자기 재량으로 화폐를 발행할 권리가 없다. 유럽중앙은행의 위임하에서만 화폐 발행이 가능하다. 더욱이 그리스는 제조업 경쟁력이 매우 낮은 나라다. 이런 상황에서 수출을 통해 자국 산업을 살리고 경상수지를 개선해 재정 건전성을 높인다는 방법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AP Photo메르켈 독일 총리(왼쪽)와 파판드레우 그리스 총리(오른쪽)가 9월27일 베를린에서 만났다.

이에 따라 ‘디폴트와 유로존 이탈이 그리스의 유일한 대안’이라는 여론이 그리스와 유럽에서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구제금융을 받는다고 해도 긴축정책 때문에 경제가 정상화되지 않고, 유로존 회원국이라는 처지 때문에 수출 촉진 정책(통화 평가절하)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앞으로 기약할 수 없는 기간 그리스 시민들은 불황과 스태그네이션(장기 경제 침체), 고실업을 견디기만 해야 하는 처지다. 그렇다면 차라리 디폴트로 부채의 일부를 탕감하고, 유로존 이탈(이 경우 유로화 대신 예전의 드라크마화를 부활)로 수출을 늘려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현실적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2000년대 초 외환위기로 IMF 관리 하에 놓였던 아르헨티나가 이런 방법으로 경제 회복을 가속화한 사례도 있다. 

대공황 혹은 장기불황 불가피

그러나 그리스의 디폴트 선언은 세계 경제위기로 발전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이 경우, 그리스 때문에 놀란 채권자들은 포르투갈·스페인 등 ‘위기 의심 국가’와 금융 관계도 빨리 청산하려 할 것이고 이는 연쇄적인 국가부도와 금리 폭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더욱이 그리스가 EU 은행들로부터 빌린 자금 규모는 1930억 달러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 또한 연쇄 위기의 강력한 뇌관이다. 그리스에 돈을 ‘떼인’ EU 은행들은 그만큼의 자본을 확충하기 위해 대출을 줄이고 이미 빌려준 돈에 대해서는 상환 요구에 나설 것이다. 이는 유럽 차원의 위기로 시작해서 미국과 아시아를 타격할 것이다. 이런 와중에 부동산, 금융상품 따위 자산 가격이 폭락하면서 ‘기업·금융기관 재무구조 악화→자산가치 폭락→수요 하락→실물경제 위축’이라는 악순환이 전 세계를 덮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위기를 저지할 수 있다는 전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먼저 ‘불황기 긴축정책’이란 황당한 미몽에 사로잡힌 ‘재정긴축 매파’들을 퇴장시킬 필요가 있다. 이런 움직임은 지금 미국에서 확산되는 ‘부자 증세’ 논쟁, ‘긴축 여론’을 주도하는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 등으로 조금씩 불거지고 있으나 아직은 역부족이다. 한편 지구 최대의 외환 보유국인 중국이 위기 국가에 구제금융을 제공하고, 2008년 말 수준의 국제 협력 분위기가 회복된다면 세계경제의 운명이 전환될지도 모른다(중국, 세계경제 구할 ‘독수리 오형제’ 될까  기사 참조). 그러나 이런 가능성이 소멸된다면, 세계경제는 갑작스러운 대공황이나 장기간의 불황 국면을 겪는 것이 현재로서는 불가피해 보인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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