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당원 1만2000명에 베를린 당원이래야 1000명에 불과하고, 창당한 지 5년도 안 되는 해적당은 이번 선거에서 12만9700표를 얻어 시의회 의석(152석) 한쪽을 차지하게 됐다. 연정을 펴오던 좌파당이 20석을 얻은 데 비하면 큰 성과다. 시의원에 당선된 ‘해적’ 15명의 직업은 대학생, 하드웨어 개발자, 자유업 종사자, 자영업자, 회사원 따위로 다양하다. 최고령자는 55세. 19세 여대생이 가장 어리다.
선거운동은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이루어졌다. 당 정책에 대한 의견 수렴도 인터넷을 통해서 한다. 그들의 핵심 정책은 ‘인터넷의 자유’와 ‘정치 투명성’이다. 국가로부터 종교를 분리시키는 ‘종교의 사유화’도 이색적인 정강이다. 대중교통 요금 폐지와 기본수입 보장, 최저임금제 도입, 무상교육 확대 등 젊은 층을 겨냥한 정책으로 무장했다. 정책의 실현성은 뒤로 미룬다. “연구하면서 가다듬겠다”라고 말한다.
해적당 당명은 스웨덴인 릭 팔크빙에가 창당한 스웨덴 해적당 Pirate Party에서 따왔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리눅스 시스템 같은 ‘리눅스 민주주의’를 표방한다. 스웨덴 해적당도 리눅스를 개발한 핀란드인 리누스 토발즈의 창의정신을 모태로 했다.
이들은 정치 아마추어이다. 안드레아스 바움 시당 위원장(33)이 “현재 시가 안고 있는 부채가 얼마냐?”라는 기자 질문에 “몇 백만 유로쯤 된다”라고 답변한 데서 알 수 있다(시 부채는 무려 630억 유로를 넘어섰다). 그럼에도 이들이 이변을 일궈낸 것은 기성 정당에 대해 평소 유권자들이 지녀온 불신과 혐오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해적당 지지층은 35세 미만의 인터넷 세대가 주류를 이룬다. 거개가 기성 정당에 반감을 가진 사람이다. “이들에게 해적당은 신선하고 젊고 모험적인 정당으로 보인다”라고 정치학자 로타 프롭스트는 말한다. 괴팅겐 대학의 페터 뢰셰 교수는 “해적당 당원들은 이상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이미 녹색당조차 ‘늙은 당’으로 보이게 만들었다”라고 기성 정당에 경고했다.
“해적당, 녹색당을 늙은 당으로 만들다”
실제로 베를린을 덮친 ‘해적 바람’에 가장 혼쭐이 난 정당은 녹색당이다. 투표에서 녹색당 지지자 1만7000여 명이 해적당에 표를 던진 것으로 분석됐다. 전국 제4당인 자민당은 6000여 표를 빼앗긴 후 1.8% 지지율로 주저앉아 원내 진입에 실패했다. 1만1000여 표를 빼앗긴 좌파당도 타격이 커서 연정 파트너에서 밀려났다. 사민당 지지자 1만3000여 명조차 해적당에 표를 던진 것으로 나타났다.
세바스티안 네르츠 해적당 대표는 “이제 원내에서 정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전국으로 확산시키겠다. 우리는 기성 정당들이 잃어버린 ‘신뢰’와 ‘신선함’을 갖고 있다”라며 ‘항의 정당’ 티를 벗겠다고 의욕을 보였다. 이에 대해 유르네 W. 팔터 마인츠 대학 교수는 “해적당의 약진은 베를린에만 국한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베를린판 안철수 신드롬’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기성 정치인과 정당에 대한 유권자의 불만과 불신이 뿌리 깊기 때문이다. 베를린에서 해적당에 표를 몰아준 유권자의 80%가 바로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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