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의 상자가 열렸지만 국내 주요 언론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주는 떡도 못 먹다니 실망이다” “한국에는 영어 할 줄 아는 기자가 없나보다”. 결국 뿔난 누리꾼들이 두 팔 걷어붙이고 번역에 직접 나섰다.

첫 테이프는 블로거들이 끊었다. 재미동포 안치용씨의 블로그 ‘시크릿 오브 코리아’(http://andocu.tistory.com), KBS 탐사보도 전문 김용진 기자의 블로그 ‘내게 거짓말 마!’(http://blog.naver.com/rkaa21)에 틈틈이 번역문이 올라왔다.

번역가 노승영씨(38)는 주한 미국 대사관 문서의 제목을 모두 번역해 자신의 홈페이지(http://socoop.net/wikileaks)에 게재하고, 사전에 나오지 않는 외교문서 축약어까지 설명해놓았다. 그러나 1980건에 이르는 주한 미국 대사관 문서 전문을 블로거 개개인이 번역하는 건 무리였다.


‘위키리크스 한국’ 사이트.
이에 미국에 거주하는 보안 전문가 나 아무개씨(45)가 공동 번역 사이트 ‘위키리크스 한국(www.wikileaks-kr.org)’을 개설했다. 누리꾼이 힘을 합쳐 한국 관련 문서를 전부 번역해보자고 나선 것이다.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 사이트가 문을 연 지 일주일도 채 안 된 9월23일 현재 84건이 번역돼 이곳에 취합됐다.

사이트를 개설한 나씨는 〈시사IN〉과 인터뷰에서 “자신들이 얘기하고 만들어놓은 문서를 거짓 폭로라고 하는 웃기지도 않는 한국의 현실에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사는 한국인으로 하도 답답해 나섰다”라고 개설 취지를 밝혔다. 나씨는 “사이트를 열자마자 한국의 특정 세력으로부터 해킹 비슷한 사이트 공격이 들어오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한국 누리꾼들이 꾸려가는 이 사이트는 스웨덴 위키리크스 공식 트위터 계정(@wikileaks)에 소개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시민들의 공동 번역 작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는 “새로운 형태의 비영리 저널리즘이 등장했다. 권력에 예속되지 않은 탐사 보도에 국민이 목말라 있다”라고 분석했다. 배정근 숙명여대 교수는 “위키리크스 문건의 ‘뉴스 가치(news value)’를 시민 스스로 평가하고 공론화한 사례이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허은선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les@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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