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부터 모든 지자체는 주민참여예산제를 의무적으로 시행하게 되었다. 그동안 조례를 갖추지 못한 곳에서는 부랴부랴 행정안전부의 예시안을 그대로 의회에 상정하기도 하고, 일부 지자체는 독자적인(참여예산의 취지를 제대로 살린) 조례안을 마련하기도 했다. 로컬 거버넌스(민간과 행정이 함께 사업을 기획해 추진하고 평가하는 과정, 즉 권한과 책임을 서로 나누는 과정)의 전형으로서 주민참여예산제에 대한 요구는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정신이 되어가고 있다.

대구의 8개 구·군 중 6개는 비록 이름뿐이었지만, 일찌감치 주민참여예산제 운영 조례를 제정해놓았다. 이에 비해 우리 북구는 아직 조례가 제정되어 있지 않아 초선 의원들을 의욕에 불타게 만들었다. 일단 우리 구의 해당 상임위인 행정자치위원회는 지난 5월 집행부에서 올라온 예시안을, 그것도 임의 조항으로 이루어진 1안을 단박에 부결시켰다. 젊은 초선 의원들로 하여금 ‘주민참여예산제’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애착을 가지게끔 자극을 주는 동료애(?)를 발휘한 것이다. 광주 북구청 방문, 의원 연구모임 결성, 참여예산 전국 워크숍 참여, 수차례 토론, 주민간담회 개최 등을 거쳐 전체 의원 20명 중 17명이 조례안을 공동 발의하게 되었다.

ⓒ시사IN 양한모

공동 발의된 안은 쟁점이었던 ‘지역회의’를 없애는 대신에 주민참여예산위원회가 그 기능까지 담당하도록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지역회의’는 구의원들의 권한을 침해하고 잠재적 경쟁자를 키울 수 있으며, 지역 주민 간에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는 일각의 주장을 반영한 것이다. 당초 일반 주민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해 주민참여예산위원회를 100명으로 구성하는 안을 제안했으나 100명은 너무 많다는 반대 의견을 수용해 일단 60명으로 시작하기로 했다. 주민참여예산 추진단도 구성해 시행 과정을 평가하고 반영하기로 했다.

핵심 조항 빠지고 위원회 구성만 축소 통과

의원 연구모임의 연구 성과물로 만들어진 조례안이라고 다들 뿌듯해했다. 소속된 당을 넘어(우리 북구의회는 한나라당 16명, 민노당 1명, 국민참여당 1명, 친박연합 1명, 무소속 1명이다) 서로 협력하며 모범적인 의정 활동을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던지라, 지역 언론들의 관심도 많았다.

그런데 9월19일 오후 소관 상임위의 조례안 심사 소식이 들려왔다. 집행부 검토 과정에서 ‘수정’ 가결됐다는 것이다. 수많은 토론을 거친 핵심 조항은 빠지고, 위원회를 달랑 30명 위원으로 구성하자는 내용이 통과됐다. 상임위 7명 중 발의 명단에 이름을 올린 의원이 5명이나 있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30명 위원을 각 분과위원회로 나누면 대여섯 명, 그들만으로 수많은 지역 주민의 의견을 수렴하고 수렴된 의견을 심의·조정한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게다가 전문가 및 비영리단체 관계자, 구의회 의원 등이 참여하는 주민참여예산추진단을 통째로 삭제한다? 그러면 구의 예산 담당 계장이 혼자서 이 모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실행한다는 얘기인가? 아니야. 뭔가 오해가 있었을 거야. 소속 정당을 넘어 많은 의원들이 공을 들인 조례안이 집행부의 이해 부족과 이견으로 절름발이가 되어서는 안 돼.

애초에 시기상조라고들 했다. 어차피 실효성이 없다고도 했다. 하지만 초기 단계에서는 제도 운영을 통한 경험, 문제점, 개선방안 도출 그 자체가 참여예산제를 정착시키는 한 과정이다. 좋은 제도라고 인정한다면 최소한 시스템만은 만들어놓자. 어차피 이 제도는 주민 요구는 많고 재정은 부족해서 시작한 것 아닌가. 풀뿌리 민주주의를 키우기 위해 기초의회에 몸 담은 것 아닌가.

이틀 뒤 본회의에서는 이 조례안을 놓고 격돌이 벌어졌다. 대구에서, 그것도 기초의회에서 정책 논쟁이 벌어지는 상황. 정회를 거듭하며 조율하는 과정을 반복하다보면 찬반 토론이 없는 기초의회의 좋은(?) 관행에 작은 파문이 일어날 것 같다. 이것은 발전이다.

기자명 유병철 (대구광역시 북구의회 의원·무소속, blog.daum.net/happy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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