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1월, 9·11 테러 전쟁이 한창이던 아프가니스탄 북부 마자리샤리프. 북부동맹의 한 군벌인 도수툼 장군의 지배지였던 ‘콰라이잔기’ 요새에서 미국 CIA 요원들이 포로를 심문하고 있었다. 이곳은 당시 북부동맹이 생포한 탈레반 300여 명을 구금하기 위해 임시 포로수용소로 급히 개조한 곳이다.

당시 포로를 심문하던 CIA 요원 두 명은 모두 사복 차림에 무장을 하고 있었다. 그중 자니 스팬이 탈레반 포로 중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를 불러내자 수염이 덥수룩한 한 젊은이가 끌려나왔다. 스팬은 집중 심문을 했고 그의 영어 실력과 발음이 거의 미국인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포로는 자신이 영국인이며, 이름은 압둘 하미드라고 끝까지 주장했다. 심문이 진행되는 와중에 갑자기 포로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포로 300명 중 80여 명만이 살아남았을 정도로 반란의 끝은 처참했다. 엄청난 시체더미가 수용소 마당에 쌓였다. CIA 요원 스팬도 그 와중에 총격으로 사망했다. 아프간 전쟁에서 발생한 최초의 미국인 사망 사건이었다.


ⓒAP Photo2001년 11월 아프가니스탄에서 붙잡힌 미국인 탈레반 존 워커 린드.
더불어 그가 심문했던, 영어를 잘하는 탈레반 포로의 진실도 밝혀졌다. 그는 존 워커 린드(당시 20세)라는 미국인이었다. 미국은 충격에 휩싸였다. 9·11 사건 이후 미국은 애국심으로 들끓고 있었다. 빈라덴과 탈레반에게 협조하는 그 어느 나라도 용서할 수 없다는 분위기였다. 그런 판국에 미국인으로서 탈레반이 된 젊은이가 있다는 사실은 충격 그 자체였다.


내성적인 두 청년, 현실 도피처로 종교 선택

2011년 7월,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 집권 노동당의 청소년 여름 캠프장과 정부 청사에서 하늘을 찢는 듯한 총성과 폭발음이 울렸다. 정부 청사에서 폭탄이 터진 직후 오슬로 북서쪽 30㎞ 지점 우퇴위아 섬 청년 캠프 행사장에서는 더 큰 비극이 발생했다. 범인은 무려 1시간30분 동안 무차별 총격을 가했으며, 도망가는 청소년에게까지 마치 게임을 하듯 조준 사격을 했다. 경찰이 공식 발표한 사망자 수만 92명. 이 두 사건의 범인은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32)라는 노르웨이인이었다. 그는 다문화주의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며 자신을 ‘반(反)무슬림 혁명’을 주도하는 운동가로 표현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노르웨이에서 벌어진 최악의 사건으로 평가되는 이 일은 세계를 경악시켰다.

린드와 브레이비크는 연배가 비슷하다. 린드는 1981년생이고 브레이비크는 1979년생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걸어간 길은 극과 극이다. 린드는 미국인 탈레반 병사로서 무슬림으로 개종했고, 브레이비크는 극우주의 성격의 보수 기독교인이다. 종교와 정치의 자유가 있는 선진국에서 자란 두 젊은이가 너무도 다른 길을 걷게 된 배경을 추적하면 지난 10년간 미국 주도 아래 벌어진 ‘테러와의 전쟁’ 현주소를 알 수 있다.

존 워커 린드는 아버지가 변호사이고 어머니가 의료복지사인 유복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랐다. 그가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은 16세 때. 주변 권유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했다. 18세 때 부모가 이혼하자 그는 아랍어를 배우기 위해 예멘에 갔다. 이어 파키스탄으로 건너가 이슬람 학교인 마드라사에서 코란과 파슈툰어 등을 배웠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탈레반 관계자나 아프간 종교 지도자들과 접촉했고, 이들의 ‘순수 이슬람 국가’ 건설 이념에 매료돼 이슬람 전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 뒤 그는 빈라덴의 테러 훈련 캠프에 합류해 칼리슈니코프 소총을 쏘는 법 등을 배웠다. 또한 탈레반 전사로 카슈미르에 파견돼 인도군과 싸우기도 했다.

외교관 아버지와 간호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브레이비크 역시 유복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다. 그 스스로 “나는 책임 있는 사람들 곁에서 우수한 가정교육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그가 이슬람 문화에 관심을 가진 것은 1차 걸프전이 발발한 20여 년 전이다. 그는 테러 직전 인터넷에 올린 이른바 선언문에서 “정치에 별 관심 없던 소년이었지만 당시 이슬람 친구들이 미군의 미사일 공격 보도를 접하고 흥분하는 모습을 보면서 관심을 갖게 됐다”라고 밝혔다. 브레이비크는 스무 살이 되던 해 우파 성향의 진보당에 가입해 지역 청년지부에서 활동했다. 약 7년 동안 정당에서 활동하다가 2006년 탈퇴했다. 이 정당이 다문화주의에 호의적이기 때문이었다고 그는 선언문에서 밝혔다. 그 후 그는 반이슬람 우파 성향의 극단주의자가 되었다.


ⓒAP Photo사진은 ‘노르웨이 테러’로 92명을 살해한 브레이비크(왼쪽에서 두 번째)가 현장 검증을 하기 위해 이동하는 모습.

ⓒAP Photo브레이비크(맨 왼쪽)가 현장 검증을 하는 모습.

두 젊은이의 공통점은 중산층 이상의 엘리트 부모를 두었고, 어린 나이에 부모가 모두 이혼했다는 사실이다. 이들 나라에서 이혼이 크게 문제되지는 않지만 그로 인해 고독과 사색의 시간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질풍노도의 사춘기에 그들이 본 세상은 종교와 민족주의 이슈로 가득했다. 내성적이던 두 사람은 현실을 도피하려 했고, 그 도피처를 종교에서 찾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린드의 어머니인 메릴린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길 원했고 의과대학에 가려 했던 공손하고 부끄럼 많은 아이다”라고 아들을 묘사했다. 아버지 프랭크는 “아들은 탈레반이 통제하는 아프가니스탄은 무슬림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참된 이슬람 국가라고 말했다. 린드는 가장 순수한 형태로 살아가며 훈련하는 곳에서 공부하고 싶어했다”라고 밝혔다. 린드는 2001년 12월 미국으로 송환되었다. 그는 금고 20년형을 선고받아 아직 10년을 더 복역해야 한다.


종교 충돌이 세대를 거쳐 문명 충돌이 되는가

브레이비크는 부모가 이혼한 뒤 파리와 런던의 노르웨이 대사관에서 일했던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아버지와 이따금 만났지만 그 만남도 15세 이후로는 단절되었다. 그즈음 그는 파키스탄 이민자 가정의 또래 청소년들과 조금씩 충돌했다. 어린 나이에 반이슬람 정서를 서서히 키우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그가 다른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그를 구해준 사람이 파키스탄계 이민자 친구라는 것에 고마워하기보다는 굴욕스러워했다.

그는 이번 테러를 9년간 은밀하고 끈질기게 준비해왔다고 밝혔다. 범행 전 인터넷에 올린 1500쪽 분량의 선언문에서 그는 노르웨이를 이슬람의 유럽 식민지화에 희생된 나라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장차 무슬림이 모든 사람에게 샤리아(이슬람법)를 강요하는 등 노르웨이를 전체국가로 만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본인을 템플 기사단의 일원인 것처럼 묘사한 그는 인터넷 여기저기서 모은 글을 짜깁기해 자신이 반이슬람의 선구자인 양 묘사하고 있다. 읽은 책과 지식을 자랑한 듯한 그의 글을 보면 이 글을 읽은 누군가가 “브레이비크의 생각이 대단하다”라고 추어올려주기를 바라는 정서가 읽힌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간절한 욕구와 혼자만의 고독이 섞여 있는 것이다. 이런 그의 욕망이 9·11 테러 이후 10년간 확산된 반이슬람 정서와 결합하면서 끔찍한 테러로 이어진 듯하다.

9·11 테러 시작과 거의 동시에 이름을 알린 미국인 탈레반 린드나 9·11 10주기 시기에 발생한 노르웨이 테러 사건의 용의자 브레이비크는 현대사에 큰 충격을 준 젊은이로 남을 것이다. 그들이 한창 미래를 고민하고 있었을 청소년 시기는 그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때였다. 이 시기를 거치며 한 사람은 이슬람으로, 한 사람은 극단주의 기독교로 흘러갔다.

10년간 테러와의 전쟁을 벌인 오늘, 매스컴에서는 이슬람과 기독교를 둘러싼 극단의 뉴스가 계속 흘러나온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10대 청소년이 이런 뉴스와 세상을 보며 자신의 종교와 가치관을 결정해나갔을까. 이들 중 제2의 린드나 브레이비크가 나오지 않으리란 보장을 할 수 있을까. 이슬람과 기독교라는 종교의 충돌이 이제 세대를 거쳐 또 다른 형태의 ‘문명 충돌’로 세상에 나오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기자명 김영미 국제문제 전문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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