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도 있다지만, 개념어 하나가 담론 전체를 집어삼켜 책을 읽지 않고도 내용을 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해체’에 해체되어버린 자크 데리다가 그렇고, ‘판옵티콘’이 꿰뚫어버린 미셸 푸코가 그렇고, ‘구별 짓기’로 분류되어버린 피에르 부르디외, ‘오리엔탈리즘’에 사로잡힌 에드워드 사이드가 그렇다. 그러니 이런 사태 이후에 나온 그들의 책은 ‘아까운 걸작’의 운명을 타고난다. 사이드의 전체 저작 중 상당수를 차지하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한 책은 단 한 권도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으며, 그의 탁월한 문학·예술 비평조차 쉽게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세계의 비극에 대한 고발과 외침이 빠진 사이드는 팥소 없는 찐빵이며, 〈오리엔탈리즘〉은 두껍고 지루한 지난 이야기일 뿐이다. 또 바흐에서부터 현대음악까지 넘나들며 천의무봉의 필력을 펼치는 비평을 빼놓으면 〈문화와 제국주의〉의 비판은 위대한 예술가들에 대한 비난으로 비치기 일쑤다.

나이가 들어도 귀가 순해질 줄 모르는 사이드는 ‘백조의 노래’인 이 책에서도 독자에게 위로와 긍정의 목소리 대신 저항과 타협하지 않는 정신을 이야기하니 ‘아까운 걸작’의 길로 망명한 셈이다. 하지만 인문학은 ‘경영 인문’ ‘CEO 인문학’처럼 교양과 우아함의 기표도, 자본주의의 맹목성을 중화해주는 장치도 아니다. 오히려 “투쟁을 드러내고 설명하며, 강요된 침묵과 보이지 않는 권력의 정상화된 평온에 도전하고 이를 물리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니 우리의 몫은 세상을 “오직 더욱더 주의 깊게, 더욱더 세심하게, 더욱더 폭넓게, 더욱더 수용적으로, 더욱더 저항적으로” 읽는 것이다.

기자명 박정현 (도서출판 마티 편집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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