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지망생을 가르치는 교수 한 분의 말씀이 생각난다. 학생들은 자기가 직접 겪었거나 주변 사람에게 전해 들은 ‘믿을 수 없는 얘기’를 소재로 소설을 쓰면 신춘문예를 비롯한 공모에서 쉽게 뽑히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이다. 분명히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라도 상식과 너무 동떨어진 듯한 얘기를 글로 옮겨놓으면 심사위원은 황당무계하다고 느끼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을 짜증나게 만드는 텔레비전의 막장 드라마가 오히려 리얼리즘에 더 충실한지도 모르겠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설 라이언 긱스를 축구 선수로서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좋아하게 된 것은 박현욱 작가가 쓴 〈아내가 결혼했다〉(문이당, 2006년)를 읽고 나서부터였다. 이 소설에서 라이언 긱스는 멋있다. 유명한 럭비 선수였던 데니 윌슨은 고작 16세인 소녀 라이네 긱스를 임신시켰는데 그 결과가 바로 라이언 긱스였다. 돈과 인기가 있었던 아버지는 긱스와 그의 어머니보다는 술과 다른 여자를 더욱 소중히 여겼다. 그는 부모가 이혼하자 아버지 성을 버리고 어머니의 성을 택했다. 축구 선수의 필생 꿈인 월드컵에 나가기 힘들다는 것을 알면서도 긱스는 끝까지 ‘어머니의 나라’ 웨일스 국가대표를 고집했다. 긱스가 잉글랜드 국가 대표가 됐다면 잉글랜드는 지단의 프랑스를 결코 부러워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한성원 그림

상금이 1억원이나 걸린 제2회 세계 문학상을 거머쥔 이 소설은 지금 와서 보면 현실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작가는 긱스가 아버지의 바람기에 질려 잉글랜드 국적을 버린 듯 썼지만 최근 드러난 긱스의 사생활은 그의 아버지도 당혹스럽게 만들 정도이다. 동생의 아내와 그 어머니까지 얽힌 스토리가 그 어떤 막장드라마 못지않게 ‘비현실적’이다.

영국의 프리미어 리그는 불륜 리그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지경이다. 긱스뿐만 아니라 머리는 제법 벗어졌지만 이제 솜털을 겨우 벗었을까 말까한 웨인 루니, 전형적인 영국 신사처럼 생긴 영국 국가대표팀의 주장 존 테리도 부뚜막에 올라간 것으로 드러나 곤욕을 치렀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의 전례까지 합쳐 이렇듯 잘나가는 남자들의 여성 편력을 바라보는 보통 남자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내 경우만 놓고 보면 솔직히 약간은 부러운  것도 사실이다. 배신감이나 실망감, 분노와는 확실히 거리가 멀다. 감정의 주류는 확실히 불편함, 혹은 거북함이다. 모든 인간 수컷의 내면에, 결국 내 마음 속에 단단히 봉인돼 있는 괴물의 모습을 만난 느낌이라고나 할까. 돈이나 권력을 손에 쥐거나, 전쟁과 같은 ‘자유로운’ 상황을 만나면 봉인에서 손쉽게 풀려나 내 안에서도 미친 듯이 날뛸 것만 같은 남성성, 혹은 폭력성의 실물을 본다. 


〈열녀의 탄생〉 강명관 지음돌베개 펴냄
인간 수컷의 내면에 웅크린 폭력성이 제도화되면 어떤 참혹한 결과를 빚는지 잘 보여주는 책이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인 강명관 선생이 쓴 〈열녀의 탄생〉(돌베개, 2009년)이다. 많은 분이 근래 나온 인문학 서적 중 최고라고 손꼽는 이 책은 남성의 성에 대한 집착이 연예면 가십거리를 넘어 사회 전체에 어떤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지 생생히 알려준다.

강 교수에 따르면 조선의 사대부는 집요하고도 ‘학구적으로’ 여성의 성을 통제하고 종속화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축첩과 기녀 제도를 통해 자신들의 성적 욕망을 무한히 확장한 그들은 여성의 머릿속에 한 남자에게만 성을 제공하는 것이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일이라고 각인하려고 애썼다. 필요하다면 그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던 성현의 말씀도 왜곡하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여성의 성을 통제하려 온 힘 기울인 조선 사대부

텔레비전 프로그램 〈1박2일〉 여배우 편에서 김수미씨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닌다고 해서 화제가 됐던 〈명심보감〉의 부행 편 정도는 애교에 속한다. 〈소학〉 〈삼강행실도〉 〈내훈〉 따위 조선시대 텍스트들은 여성은 항상 조신하게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정도였던 〈명심보감〉 유의 고려시대 처세책과는 확연히 비교된다.

조선시대 텍스트 가운데는 정절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 고금의 여성 사례를 모은 〈삼강행실도〉 열녀 편이 단연 압권인데, 이 책이야말로 조작의 결정판이다. 본래 이 책은 중국의 〈열녀전〉 〈고금 열녀전〉을 베꼈는데 남자보다 뛰어나고 덕성 높은 여성의 사례는 모두 편집하고 한 남자나 가문을 위해 목숨 바친 사례만 넣었다. 원문은 ‘烈女’가 아니라 여러 여자란 뜻의 ‘列女’일 뿐이다. 중종 때 교서관은 이 〈삼강행실도〉를 무려 2940질이나 찍어 중앙과 지방에 배포했는데 당시 교서관이 찍어내는 어떤 서적도 300부를 넘어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조선의 사림은 이 텍스트의 보급에 거의 광적인 행태를 보였다. 


〈전쟁 유전자〉말콤 포츠·토머스 헤이든 지음 개마고원 펴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교육의 효과는 여실히 드러났다. 〈삼강행실도〉의 속편 격인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정절을 지키려다 목숨을 버린 441명의 여성 사례가 실려 있다. 왜군의 손에 닿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손과 발을 잘라버린 여성도 있었다. 병자호란 때 납치됐다가 풀려난 ‘환향녀’ 가운데서도 자살자가 속출했다. 양대 전란이 끝나고 나서 정절을 지키려고 목숨을 끊는 것이 흔한 일이 돼버리자 이번에는 남편이 죽으면 따라 죽는 것을 여성의 미덕으로 칭송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너무나 많은 자살자가 속출해 조정에서 오히려 당황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조선의 사대부가 심어놓은 이 이데올로기는 지금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용을 쓴다.

남성의 성에 대한 집착, 그리고 그것이 어째서 필연적으로 살인이나 전쟁과 같은 폭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지 진화론의 관점에서 규명하고자 한 책이 바로 〈전쟁 유전자〉 (개마고원, 2011년)이다. 영국 출신의 생식의학자이자 가족계획 전문가이기도 한 이 책의 저자 말콤 포츠에 따르면 우리는 적을 살해하고 여성을 강간해 더 많은 자손을 낳은 자들의 후손이다.

2003년 여러 나라의 유전학자로 구성된 연구팀에서 중앙아시아인을 대상으로 한 DNA 분석 결과를 발표했는데 그 내용이 놀라웠다. 중앙아시아 남성의 8%가 동일한 Y염색체를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것은 이들이 모두 한 명의 후손이란 뜻이다.

과학자들이 지목한 바로 그 남자는 칭기즈칸이다. 정복자 칭기즈칸은 전쟁과 성을 절묘하게 결합한 인물이었다. 그는 정복지의 남성을 철저하게 말살하고 과시라도 하듯 남의 아내와 딸을 범했다. 현대 과학자들은 오늘날 전 세계 칭기즈칸의 직계 자손이 1600만명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한다. 전체 남성 200명 중 1명의 몸속에는 잔인한 정복자의 피가 흐른다는 얘기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든, 1·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지식인이든, 가미카제 참여자든, 자살 폭탄 테러 용의자든 겉보기엔 멀쩡한 사람들이 ‘시체가 산을 이룬 전쟁터에서 전에는 결코 경험하지 못했던 희열을 느꼈다’고 머리를 감싸안으며 고백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우리는 양손에 살인 무기를 들고 피의 강을 건너온 칭기즈칸과 그 아류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남성의 폭력성을 변호하려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다. 그는 인구 증가의 압력을 줄이고 여성에게 더 많은 권한을 주는 것이 남성 속에 봉인된 괴물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강명관 교수는 자신이 일상에서 내뱉는 언어, 어떤 사태에 대해 갖는 태도가 과연 누구 것인지 살피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이 진화의 그을음이 됐든, 자본이나 권력이 됐든 ‘나’ 아닌 다른 것에 의해 휘둘리고 싶지 않다는 강 교수의 태도에 나는 동의한다.

기자명 문정우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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