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은 1970년대. 극장에서는 영화 〈러브 스토리〉의 두 주인공이 눈밭에서 떼굴떼굴, 텔레비전에서는 프로레슬링 선수들이 떼굴떼굴. 김일 선수 박치기 한 방에 상대 선수가 매양 눈을 허옇게 뒤집으며 ‘떡실신’하던 그 시절,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이랑(박신혜)과 철수(송창의)가 단둘이 마주앉아 처음 대화를 나눈다. 장소는 철수의 삼촌이 운영하는 ‘우주전파사’. 어깨너머 배운 기술로 온갖 가전제품을 돌팔이로 수리해주는 이공계 꿈나무 철수에게 이랑이가 고장 난 라디오를 들고 온 날이었다.

철수는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다는 거창한 꿈을 계속 이야기하지만, 이랑이는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처럼 예쁘게 연애하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끝내 이야기하지 않는다. 남학생은 말하고 여학생은 듣는다. 그냥 듣는 게 아니라 눈을 반짝이며 들어준다. 비가 오기 시작했고, 이랑이가 자리에서 일어섰고, 철수는 찢어진 비닐우산을 찾아냈다. 그걸 빌려 쓰고 철길을 걸어가는데 철수가 다급하게 불러 세운다. 가게 구석에서 뒤늦게 찾아낸 멀쩡한 노란색 우산을 이랑이 손에 억지로 쥐여주고, 자신은 찢어진 비닐우산을 비스듬히 세워 대충 비를 막으며 돌아오는 길. 철수는 귓불까지 빨개지며 배시시 웃고 있었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서툴고 수줍은 첫사랑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떤 장면도 잘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애니메이션 〈소중한 날의 꿈〉을 다시 떠올리며 자판을 두드리는 지금, 내 입가에도 배시시 웃음이 번진다. 세찬 비를 예쁘게 튕겨내던 노란 우산과, 파란 비닐우산의 찢어진 틈 사이로 살짝살짝 드러나던 철수의 붉은 뺨이 애틋했기 때문이다. 안테나를 길게 뽑아 라디오 주파수를 찾던 기억도, 목을 길게 뽑아 교실 창문 너머로 짝사랑 여학생을 찾던 추억도 생각났다. 씩씩하고 풋풋한 이 아이들의 성장기를 보면서 그리 씩씩하지 못했고, 너무 빨리 풋풋함을 잃어버린 내 청춘을 잠시 후회도 하게 되었다. 내 ‘소중한 날의 꿈’은 뭐였더라? 다시 궁금하게도 만들었다.

지금까지 몇몇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이 미안한 표정으로 관객 앞에 내민, 파란 비닐우산 같은 작품들과는 다르다. ‘한국 애니메이션은 안 돼’ ‘그림은 잘 그리는지 몰라도 스토리가 영…’ ‘일본이나 미국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지’…. 작품을 보기도 전에 미리 팔짱부터 끼고 비딱하게 서서 눈 흘기는 사람들 머리 위에서, 우리의 근심 걱정 멋지게 튕겨내는 노란 우산이 될 것이다, 이 작품은.

기획부터 개봉까지 제작 기간 11년. 일일이 손으로 그린 그림의 수가 10만 장. 〈인어공주〉 〈아내가 결혼했다〉를 쓴 시나리오 작가 송혜진은 밑줄 긋고 싶어지는 멋진 대사로 힘을 보탠다. 배우 송창의와 박신혜의 목소리 연기도 기대 이상. 물론 미야자키 하야오의 경이로운 작품을 떠올리면 이 정도 만듦새가 성에 찰 리 없지만, 나름의 소박한 미덕으로, 나름의 친근한 이야기로, 우리가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극장을 나서게 만든다. 줄곧 패전만 기록하던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이 이번엔 무시하지 못할 구질과 제구력을 갖추고 마운드에 서는 것이다.

여기, 매일 수많은 새 연필이 몽당연필이 될 때까지 꿈을 그리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에는 마우스로 클릭하지 못하는, 꼭 연필심으로, 자신의 손끝으로 끄집어내야만 하는 진실과 진심이란 게 있다고 믿는 사람들. 〈소중한 날의 꿈〉은 그런 사람들이 만들었다. 지난해, 이 영화를 먼저 본 어느 외국 관계자가 이렇게 말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아직 한국에서 개봉하지 않은 이 작품의 그 어떤 장면도 잘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생각도 그 양반 생각과 같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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