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판사라면 어떤 판단을 내릴까요?” 도덕 수업을 맡은 김정아 교사가 질문을 끝내기 무섭게 반 아이 37명 대부분이 손을 뻗었다. 빨간색·초록색 카드를 든 팔에 힘이 실렸다. 모두 발표해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5월31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중학교 1학년 갈겨니반, 5교시. 9개 모둠으로 나눠 앉은 아이들 표정에서는 점심 시간 후 어김없이 찾아오는 졸음의 기운을 찾을 수 없었다.

이날 수업 보조 자료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의 내용 중 일부였다. 표류하는 구명보트에 탄 4명의 선원, 그중 죽어가는 17세 소년을 죽여 생명을 연장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실화다. 무사히 구조된 이들에게 죄를 물어야 할까. 유죄라고 생각하는 학생은 빨간색 카드를, 무죄라면 초록색 카드를 들었다. 도덕 교과의 ‘도덕적 탐구’ 파트였다.
 

ⓒ조우혜혁신학교인 경기도 고양시 덕양중학교 1학년 갈겨니반 학생들이 5교시 도덕수업을 진행하다 포즈를 취했다.

 


“어차피 죽을 거니까 (소년을) 희생해 3명이 사는 게 낫다” “소년의 동의를 구한 것도 아니다.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먹으면 되지 않나”에서부터 “사람을 죽이지 않아야 하는 당위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당위는 먹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까지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하버드 대학 강의와 얼추 비슷한 풍경이었다.

덕양중학교는 2009년 혁신학교로 지정됐다. 경기도 교육청이 혁신학교 모델을 실시한 첫해였다. 덕양중학교는 6개 반, 전교생 163명, 교사 20명으로 이뤄져 있다. 혁신학교라는 소문에 한 반에 약 25명이던 신입생이 35명으로 늘어났다. 인근의 항공대 학생과 멘토링을 맺는 등 지역사회와 연계가 잘 되어 있다. 갈겨니반의 안선주양(13)은 “초등학교에서는 주로 선생님이 하는 말을 받아썼는데 중학교에 올라와서는 수업 시간에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할 수 있어서 좋다”라고 말했다.

덕양중학교를 비롯해 경기도는 현재 혁신학교를 71개 운영하고 있다. 김상곤 교육감이 2009년 당선하며 시작한 혁신학교 바람은 경기도 울타리를 훌쩍 넘었다. 진보 교육감이 등장한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현재 서울 23곳, 광주 4곳, 강원 9곳, 전북 20곳, 전남 30곳에서 혁신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보수적인 교육감이 수장인 충청남도는 혁신학교 5곳을 운영 중이다. 눈에 띄는 것은 교육청이 아닌 도청에서 먼저 제안했다는 사실. ‘행복공감학교’는 안희정 충남도지사의 공약이었다. 나머지 지역은 정확히 진보 교육감 벨트와 겹친다.

혁신학교는 진보 교육감들이 무상급식에 이어 전면에 내세운 2라운드 전선이다. 김상곤 교육감이 던진 무상급식 논쟁이 1라운드였다면, 이 1라운드 여론전의 결과는 완승이었다. 무상급식은 우리 사회 복지논쟁과 겹치면서 진보 교육감이든, 보수 교육감이든 성향과 무관하게 받아들여졌다. 오히려 전교조 출신인 민병희 교육감이 당선한 강원도는 교육감 의지와는 무관하게 재정 상태 때문에 전면 시행을 미루고 있다(24쪽 그림 참조).

2라운드 전선인 혁신학교는 이명박 정부가 내세운 특목고나 자율형사립고(자사고)와 대척점에 서 있다. 경쟁과 수월성을 중시한 자사고와 달리 혁신학교는 학생과 교사 그리고 학부모가 함께하는 배움의 공동체를 지향한다.

물론 무상급식처럼 낙인찍기도 없지 않았다. 처음에는 혁신학교라는 이름을 두고도 좌파 딱지가 붙었다. 2009년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이 혁신학교를 들고 나오자, 경기도의 한 교육위원은 ‘혁신(革新)은 가죽을 벗겨서(革) 새살을 돋게 하는 것(新)’이니 좌파이고 혁명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교과부, 혁신학교 견제에 나섰다?

지난해 교육감 선거 때 진보 벨트 교육감 후보들은 공약으로 모두 혁신학교를 내세워 당선했다. 당선과 함께 속도가 붙었다.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 김승환 전북도 교육감, 민병희 강원도 교육감, 장만채 전남도 교육감, 장휘국 광주시 교육감(왼쪽부터)은 진보 교육감 6인으로 꼽힌다.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은 지난 3월 23개 학교를 혁신학교로 지정했다. 초등학교 10개, 중학교 10개, 고등학교 3개교 등이다. 혁신학교에 연간 2억원가량 운영비를 지원할 방침이다. 애초 서울시 교육청은 40개 학교를 혁신학교로 지정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지원율이 낮았다. 모두 27개 학교가 지원했다. 낮은 지원율을 두고 서울시 교육청 안팎에서는 입시 교육의 아성인 서울의 특성과 일선 교장의 복지부동이라는 분석이 있었다. 혁신학교는 교사·학부모가 자발적으로 뜻을 모아야 신청할 수 있다. 사교육 1번지인 서울의 경우 학부모들이 입시 경쟁에서 밀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혁신학교 교장은 수직적 연공서열 관계에서 행정업무를 지원하는 수평적 리더십으로 내려와야 한다. ‘교사는 수업, 행정은 교장·교감’이 맡는 구조가 혁신학교이다. 교장의 일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또 혁신학교를 위해 연수를 받는 교사에게 승진 점수도 주어지지 않는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이다. 가산점을 주면, 무늬만 혁신학교가 생기는 부작용 때문이다. 경기도가 만든 첫 모델부터 자발성을 부여했다. 경기도 교육청의 한 관계자는 “이전에 교과부에서 추진한 열린학교라든지 공교육 차원에서 변화를 승진 점수와 연관시키는 관 주도 방식은 반짝 효과만 있었지 실효성은 없었다”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상대적으로 혁신학교에 뜻이 있는 사람들끼리 뭉쳤다. 서울의 한 혁신학교 교사는 “굳이 혁신학교를 안 하겠다는 교장하고 싸워서 힘을 빼기보다는 혁신학교로 지정된 학교에 지원하면 된다. 승진 점수가 부여되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의지가 있는 교사끼리 의기투합이 된다”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중앙일보〉는 서울시 교육청이 전교조 교사들만 혁신학교로 발령을 냈다며 ‘전교조 학교’라는 낙인을 찍기도 했다. 〈조선일보〉도 ‘혁신학교를 전교조 학교로 만들 셈인가’라는 사설을 썼다(2월26일자).

교장 자격증이 없는 교사를 교장으로 임명하는 내부공모형 교장제를 진보 교육감들이 확대하려는 것도 혁신학교 연착륙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교과부는 서울 영림중에서처럼 내부공모형 교장 임명 제청을 거부했다. 이를 두고 교과부가 혁신학교 견제에 나섰다는 비판이 있다.

전교조 출신 장희국 교육감이 당선한 광주는 ‘빛고을혁신학교’라는 이름으로 혁신학교를 추진했다. 지난해 연말 7개 학교가 신청해 올해 4곳을 선정했다. 초등학교 2곳과 중학교 2곳이다. 매년 1억원 안팎이 지원된다. 장 교육감은 혁신학교를 내년에 10개교, 2013년에 16개교, 2014년에 22개교로 늘려갈 계획이다. 광주시 교육청 학교혁신지원팀 현성룡 장학사는 “벌써 지원하려는 학교가 늘어 계획보다 더 확대될 것 같다”라고 말했다. 광주·전남권의 혁신학교 열기는 5월16일 열린 혁신학교 국제 심포지엄에서도 확인되었다. 전교조 등이 중심이 되어 독일·핀란드 교사를 초빙해 혁신학교 국제 심포지엄을 전국 16개 시·도 교육청을 돌며 열었는데, 광주·전남권에서만 교사 900여 명이 참석했다.

장만채 교육감이 당선한 전남도 교육청은 지난해 혁신학교인 ‘무지개학교’ 신청을 받았다. 초등학교 39곳, 중학교 10곳, 고교 9곳 등 58개 학교가 신청했다. 이 가운데 초등학교 10곳, 중·고교 각각 10곳 등 30개 학교를 무지개학교로 지정했다. 강원도가 추진하는 혁신학교 명칭은 ‘강원행복+학교’이다. 9개 학교에서 운영되고 있다.

수혜자 한정돼 여론 지지받기 쉽지 않아

경기도 교육청 다음으로 혁신학교 속도전을 내는 곳은 전북도 교육청이다. 전북도 교육청은 20곳에서 혁신학교가 운영되는데, 내년에 30곳을 추가로 지정할 계획이다. 2014년까지 혁신학교를 100곳으로 확대할 방침이다.

 

 

 

 

ⓒ뉴시스5월20일 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 서울본부가 서울시 교육청에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한 주민 발의 청구서와 서명인 명부를 제출했다.

 


진보 교육감 벨트에서 동시에 시행되는 혁신학교는 시행착오도 겪었다. 강원도는 내부형 교장공모와 교사 초빙 과정에서 교육과학기술부의 관련 지침을 어겨 파행을 겪기도 했다. 광주에서는 일반 학교가 역차별을 받아 학부모 민원이 제기되었다. 혁신학교는 보통 정원이 25명 안팎이다. 25명은 교사가 아이들을 개별적으로 중시하고 창의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적정 규모로 평가된다. 그런데 광주 수완중학교가 혁신학교로 지정되면서 풍선효과가 발생한 것이다. 수완중학교 정원이 학급당 25명으로 제한되면서 이 학교에 배정받지 못한 150여 명이 일반 학교로 분산된 결과 인근 중학교가 콩나물 교실로 바뀌었다. 광주시 교육청 관계자는 “결국 중학교는 일반 학교와 정원을 똑같이 배정했다”라고 말했다.

더 근본적으로 혁신학교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1라운드 무상급식과 비교해보면, 2라운드 격인 혁신학교는 수혜자가 한정되어 여론의 지지를 받기가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혁신학교에 선정된 학부모들은 변화를 피부로 체감하지만 일반 학교 학부모들은 변화를 전혀 체감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장은숙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대표는 “진보 교육감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나. 기대는 컸는데 현장에서는 기대만큼 성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라고 말했다. 장 대표는 “학부모가 체감하는 변화는 수업의 변화이다. 4년간 공교육 변화만 충실히 해도 다 할 수 없을 텐데, 실험적인 혁신학교까지 중앙정부가 딴죽을 걸면서 힘을 빼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혁신학교에 몸담고 있는 현직 교사들은 연속성을 걱정한다. 진보 교육감 벨트에서만 이뤄지는 혁신학교가 과연 4년 뒤에도 지속될 수 있느냐 하는 우려이다. 서울 지역의 한 혁신학교 교사는 “최대치로 잡으면 전체 학교의 10%가 혁신학교로 바뀌는데 학부모들이 변화를 체감하기도 전에 교육감이 바뀌면 혁신학교가 찻잔 속 태풍으로 그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 같은 우려에 대해 혁신학교 맏형 격인 경기도 덕양중학교 윤은순 교감은 “혁신학교라고 하면 큰 환상을 가지는데 교과과정이 다른 게 아니라 수업 방식의 혁신을 꾀하는 것이다. 그 혁신은 교사의 자발성에 달렸기에 지속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혁신학교 국제심포지엄 위원장을 맡았던 안승문 전 서울시 교육위원은 “혁신학교가 진보 교육감만 한다고 생각하는데, 배움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공교육 혁신 흐름은 국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독일에서도 ‘개혁학교’라고 해서 공교육 개혁이 이뤄지고 있다. 혁신학교로 대변되는 공교육 변화는 세계적인 흐름이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고제규·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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