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윤리 시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인간은 삼라만상 가운데 홀로 존엄한 존재’라고 배웠다. 교과서에는 하품 나는 얘기만 써 있다는 걸 익히 아는 터였지만, 이건 좀 심하지 싶었다. ‘찌질’한 나와 내 친구들은 물론이고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우주 만물을 대표할 만큼 위엄 있는 인물은 찾아볼 수 없었다.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걸까. 조회 때마다 지치지도 않고 한 말 또 하는 머리 까진 교장 선생님? 화장실에서 담배 피우는 우리에게 비닐 호스로 물을 끼얹으며 즐거워하는 독일어 선생님?

다른 분야에 비해 과학 도서는 고전의 반열에 오르기가 어렵다. 현대 과학의 발전 속도가 무지막지하게 빠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리처드 리키의 〈오리진〉,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린 마굴리스와 도리언 세이건이 쓴 〈마이크로 코스모스〉는 수십 년을 용케도 살아남았다.

그중에서 무려 24년 만에 새롭게 번역되어 출간된 〈마이크로 코스모스〉(김영사)에 따르면, 내가 고등학교 시절 인간의 존엄함에 의구심을 품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저자들은 인간의 학술적인 이름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다시 말해 ‘인간, 현명하고 또 현명한’이라는 데 어이없어한다. 인간의 학명은 호모 인사피엔스, 즉 ‘인간, 현명함과는 거리가 멀고 멋도 없는’이 적격이라고 말한다. 우리 인간은 자연이 낳은 경이로운 자녀임에 틀림없지만, 미생물에 비하면 가장 진화된 생물종이라고 감히 명함을 내밀 자격이 없다는 게 저자들의 냉정한 판단이다.  


ⓒ한성원 그림

이를테면 모든 생물종에게 가장 중요한 섹스만 해도 그렇다. 대한민국을 한때 벌벌 떨게 했던 국제통화기금(IMF)의 총재마저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하게 만든 그 욕망의 종착역 말이다. 생물학적으로 섹스란 별개의 근원으로부터 유전자를 받아 나의 것과 결합하거나 혼합하는 활동을 말한다. 그것은 생식과는 다른 개념이다. 노쇠한 생물체도 생식 없이 새로운 유전자만 받아들이는 성행위는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인간을 포함한 동식물의 ‘정자 대 난자’식의 성적 결합은 생식이라는 과정에 밀착되어 있다.

박테리아야말로 지구의 임금

동식물에게는 무한한 쾌락을 주면서도 엄청난 속박이기도 한 성과 생식의 굴레를 박테리아는 벗어던졌다. 박테리아의 성은 훨씬 유연하며 잦다. 생식 기간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언제든 누구와도 유전자 교환이 가능하다. 심지어 죽은 박테리아나 유기된 DNA와도 교접한다. 난잡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성과 생식에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다. 뚜마담도, 밀당(밀고 당기기)도, 성형도 필요 없고 성추행범으로 구속될 일도 없다. 박테리아의 성은 동식물보다 20억 년은 앞선 것으로 추정된다. 저자들에 따르면, 박테리아가 이 지구의 임금이라면 인간은 변두리 신사나 곧 떠날 나그네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의 책벌레이자 골동품 수집가인 폴 콜린스는 한때는 잘나갔던 역사 속 인물을 끄집어내 인간이 얼마나 덜떨어진 존재인지 보여준다. 그가 쓴 책 〈밴버드의 어리석음〉에는 돈과 명성에서 최고점에 올랐다가 나중에는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거나 철저하게 망각 속에 묻혀버린 인물 13명이 등장한다. 이들의 망상과 사기에 전 세계가 휘둘렸던 걸 생각하면 인간이 이성을 가진 존재라는 게 영 의심스럽다. 


〈밴버드의 어리석음〉폴 콜린스 지음양철북 펴냄
폴 콜린스에 따르면, 1900년대 후반까지도 지구 안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고 믿는 미국인이 적지 않았다. 나이 든 분들은 어려서 비슷한 내용의 할리우드 영화를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전쟁 영웅인 존 클리브 심스는 무슨 영감을 받았는지 1810년부터 지구 안에 여러 층의 구가 있고, 각 구의 극지에 구멍이 있어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이 웃어넘겼으나 〈검은 고양이〉를 쓴 에드거 앨런 포와 같은 위대한 작가가 그에게 동조해 지구 속 세계에 대한 소설을 썼다. 19세기 중반에는 〈바다 밑 2만리〉를 써서 유명해진 쥘 베른 역시 에드거 앨런 포에 매료되어 지구 속 세계를 탐험하는 소설을 세 편이나 썼다. 켄터키 출신 상원의원 리처드 존슨을 비롯한 많은 상·하원 의원이 남극 원정대를 꾸리자는 발의를 하기에 이르자 심스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인사가 되었다. 지금도 가끔 집단 자살로 미국을 공포에 떨게 하는 사이비 과학 종교가 이때 나왔다. 반지성주의가 판치던 독일 나치의 제3제국 역시 ‘지구 속 지구’ 설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이 기이한 소동은 19세기 말 원정대가 극점에 다가가고 나서야 가라앉았다.

〈밴버드의 어리석음〉을 보면 대중은 돈 말고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 남을 갈취해서라도 성공한 사람, 억지 주장을 펴서라도 유명해진 사람을 칭송하고 따르는 경향이 강하다. 폴 콜린스는, 대중은 사람들이 단순히 탐욕과 운만으로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어한다고 생각한다. 부도덕하게 성공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도덕적인 패배자가 있다는 것보다 더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설명이다.

요 몇 년간 옥상 농업에 푹 빠져 지낸다. 올 봄에도 널찍한 플라스틱 화분에 고추·오이·가지·토마토 모종과 10여 가지 채소를 심었더니, 마치 대농이 된 듯한 기분이다. 우리 빌라보다 높은 곳에 사는 이들이 간혹 내려다보면서 도대체 무슨 비료를 쓰기에 그 집 작물은 그렇게 잘 크느냐고 묻곤 하는데 여기엔 비밀이 있다. 옥상의 밭을 푸르게 가꾸는 것은 우리 3부자의 오줌이다. 큼지막한 병에 담아 삭혔다가 물에 희석해 뿌려주면 아래위 다섯 가구쯤이 실컷 먹을 수 있는 채소를 수확한다.

옥상에다 농사를 지으며 우리가 생명인 물을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비이성적인지 깨달았다. 인류가 물로 멸망할 거라는 성서의 예언이 적절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든다. 천연 비료인 오줌을 버리려고 하루에 몇 차례나 귀중한 식수를 하수구에 흘려보내는 것은 정말로 제정신 가진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초기 강우만 빼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물이 빗물인 줄 아는 사람도 드물다.

빗물에 대한 세간의 편견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려주는 책이 바로 〈빗물과 당신〉이다. 탁월한 단행본 편집자인 강창래씨가 서울대 빗물연구소 한무영 소장과 인터뷰한 결과를 묶은 책이다. 한 소장은 2004년 스타시티에 생활용수를 모두 조달할 수 있는 빗물 관리 시설을 만들었는데, 국제물학회지는 이를 ‘미래형 물관리 모델’이라고 불렀다. 그는 토목공학자이면서도 대형 토목공사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이제 많지 않다고 단언한다.

박정희 철권통치 그리워하는 사람들

그동안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콘크리트 같은 신념으로 무장하고 전 세계를 파헤쳐온 사람들이 토목공학자이다. 이들은 강을 막고 산을 허물어 인공위성에서도 관측할 수 있을 만한 대형 구조물을 지구 곳곳에 만들어놓았다. 이들은 한때 인간에게 영원한 번영을 가져다줄 메시아처럼 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한무영 교수의 말대로라면 이들은 〈밴버드의 어리석음〉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점점 위축될 수밖에 없다. 저자 폴 콜린스가 쓴 서문에 나온 표현을 빌리자면 대형 토목공사는 ‘기술의 진보라는 철조망 위에서 죽은 무수한 실험’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렇더라도 한반도에선 4대강 공사가 경북 구미 지역의 식수를 일주일 가깝게 끊어버릴 만큼 아직 존엄하다. 5·16 군사 정변 50주년에 바로 그 구미가 고향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탐욕과 운만으로 부도덕하게 성공한 것은 절대 아니라고, 많이 팔린다는 그 신문들은 거품을 문다. 김일성·김정일 독재 치하에선 하루도 못 산다는 사람들이 어째서 박정희 철권통치는 그렇게 그리워하느냐고 물어봐야 입만 아플 뿐이다. 호모 인사피엔스를 어디 한두 해 겪어보는가.

기자명 문정우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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