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찰하기 좋은 길이다. 완만한 산길 걸으며 이것저것 둘러볼 게 많다. 톡 터지는 꽃망울에 싱그러움이 가득하고 흙길은 푹신하다. 산 정상까지 오르기 위해 거친 숨을 몰아쉬지 않아도 되니 절로 사색과 명상이 뒤따른다. 산 위보다 산 밑에서 누릴 게 많은 길, 오르락내리락 고갯길을 걸으며 ‘천년 불심’을 헤아리는 길, 전남 순천 조계산 선운사에서 송광사를 잇는 ‘굴목재’ 길이다.

조계산은 884m의 높지 않은 산이다. 산세는 험하지 않고 넉넉하다. 산자락에 한국 불교의 양대 산맥이라는 선암사와 송광사를 품었다. 선암사는 태고종 태고총림, 송광사는 승보종찰 조계총림이다. 선암사는 동쪽, 송광사는 서쪽에 둥지를 틀었다. 굴목재는 이 두 절을 동서로 잇는 길이다. 옛길 코스가 아름다워 꼭 정상을 밟지 않아도 된다. 선암사 쪽을 선암큰굴목재라 하고, 보리밥집 지나 송광사 쪽을 송광굴목재라 부른다. 들머리는 선암사와 송광사 길 어느 곳을 잡아도 좋으나 선암사 길이 조금더 편하다. 


ⓒ박준배 제공선암사 가는 길에 있는 승선교(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돌다리 중 하나다.

조계산 선암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느릿느릿 길을 나선다. 매표소를 지나 1㎞ 남짓 걷는 길이 호젓하다. 평탄하고 널따란 길은 한국관광공사에서 전국 최고의 ‘명상로’로 선정할 만큼 울창하다. 얼마간 더 오르면 아름다운 아치형 석조다리가 시선을 붙잡는다. 보물 제400호 ‘승선교’이다. 조선 숙종 39년인 1713년 호암대사가 6년에 걸쳐 완공한 전통 석조 홍예교(무지개다리)로 성스러움의 상징이다. 선암사를 찾는 이들이 이 다리를 건너면 오욕과 번뇌를 씻고 선계로 들어간다는 의미다.

1500년 세월의 선암사는 아늑하고 정갈한 절집이다. 시간의 더께가 무겁다. 단청은 빛이 바래 은은하다. 대웅전을 지나 무우전으로 가는 길,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토종 매화 ‘선암매’가 있다. 수령 300∼600년 묵은 고매(古梅)가 향기를 뿜어낸다. 


ⓒ박준배 제공조계산 선암사와 송광사를 잇는 굴목재길은 ‘명상로’라 불릴 만큼 고즈넉하다.
전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멋들어진 ‘해우소’도 볼 수 있다. 옛말로 쓰인 ‘뒤깐’이 인상적이다. T자형 목조 건물에 맞배지붕의 2층 누각. 삐걱거리는 널찍한 마루 밑으로 바닥이 깊고 아득하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정호승 시인은 선암사 ‘뒤깐’에서 대소변을 몸 밖으로 버리듯 번뇌와 망상을 아낌없이 떨치라고 노래했다.

송광사·선암사 스님들의 왕래길

선암사 옆길을 따라 선암큰굴목재로 향한다. 선암사-송광사 두 절을 잇는 6.8㎞의 숲길은 싱그러운 연둣빛 싹을 틔우고 있다. 완벚나무가 마지막 꽃잎을 흩날린다. 산길은 골짜기를 옆에 끼고 간다. 골짜기 물이 재잘재잘 동행을 자청한다. 완만한 산길이라 해찰하기 좋다. 상쾌한 바람이 목덜미를 훑고 새소리, 계곡물 소리 경쾌하다. 이제야 보는 데만 갇혀 있던 시야가 풀리고 오감이 열린다. 


굴목재는 선암사와 송광사의 스님이 산문을 깨치기 위해 수시로 왕래하며 수행한 길이다. 편백나무 숲을 지나면 굴목재 넘는 길까지 제법 가파르다.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지나온 길의 실체를 더듬는다. 숨이 턱까지 차오면 쉬고, 호흡이 안정되면 다시 걷는다. ‘삶과 죽음’의 화두를 잡고 욕망과 번뇌를 버렸을 ‘천년 불심 길’을 가늠해본다. 관념으로 빠지는 것을 경계하며 겨울의 끝자락을 밀어내지 못한 채 낙엽과 뒹구는 그늘진 숲길을 밟는다.

굴목재를 오르는 길. 곳곳에 숯가마 터가 널려 있다. 반세기 전까지 활활 타올랐던 가마터다. 동네 주민들에 따르면 1960년대까지만 해도 조계산 곳곳에 숯가마 연기를 피워 올렸다. 이곳에서 구워진 참나무 숯이 순천과 보성, 벌교를 거쳐 서울까지 열차 타고 올랐다. 아이러니하게도 화전민이 완전히 사라진 건 남북 간 대결이 극한에 치닫던 1968년 이후란다. 선암큰굴목재와 송광굴목재 사이에서 30여 년간 살고 있는 조계산 보리밥집 최석두씨는 “김신조 청와대 피습 사건 이후 공비 잡는다고 하는 바람에 화전민이 다 사라졌다”라고 말했다.

ⓒ박준배 제공선암사 쪽에서 편백나무 숲을 지나면 길은 가팔라진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이렇게 가파를까.
그러고 보면 굴목재는 마냥 즐기기에는 아픈 산이다.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한국 근현대사의 생채기가 그대로 남아 있다. 광복 이후 조계산은 빨치산의 주요 활동 무대 중 하나였다. 빨치산의 총사령부가 있는 지리산에서 전남 서부 지역으로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굴목재는 빨치산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든 길이다. 실제로 조계산은 1948년 여순사건(항쟁) 이후 패퇴한 빨치산들이 1950년까지 최후의 저항을 하다 목숨을 잃었던 곳이기도 하다.

큰굴목재를 넘으면 바로 ‘주막집’이라고 불리는 보리밥집이다. 꿀맛 같은 비빔밥 한 그릇에 막걸리 한잔 걸치면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이제 가파른 오르막은 없다. 송광굴목재는 큰 힘 들이지 않고 갈 수 있는 적당한 오르막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굴목재의 뜻이 뭘까. 산행길 곳곳에 나무 이름과 유적지 정보를 매달아놓는 행정기관의 세심함이 고맙지만, 정작 굴목재의 뜻은 모르겠다. 이 동네 사람들은 울창한 숲이 굴을 만들어놓은 모습을 보고 ‘굴목재’라 불렀다고 전한다. 과거 ‘공비 토벌’이라는 미명하에 벌목하고 불을 놓았기 때문이다. 


송광굴목재부터 송광사까지는 가파른 내리막이다. 시원한 풍경도 아니지만 쉬엄쉬엄 내려올 만한 하산길이다. 볼거리도 적지 않다. 조선 초 척불 정책 시절, 대들보를 빠뜨린 전설이 있는 연못 ‘보소’, 송광사의 대표적인 골짜기 ‘홍골’ 등을 둘러볼 수 있다. 송광사를 1㎞ 남짓 앞두고 밟는 흙길 촉감이 부드럽다. 해인사·통도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삼보사찰의 하나로 불리는 송광사에 이르러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면 해찰은 사라지고 없다. 



먹을거리
선암사-송광사 사이 ‘보리밥집’

1979년 무렵. 군대를 갓 제대한 스물일곱 살 청년 최석두씨는 천막 하나 둘러메고 굴목재에 들어섰다. 최씨는 선암사와 송광사 굴목재 중간 지점에 자리한 숯가마 터에 짐을 풀었다. 과거 최씨의 아버지가 일하던 숯가마 터였다. 최씨는 약초를 재배하고 밭을 일구기 시작했다.

이듬해 1980년 초, 음력 사월초파일을 전후해 굴목재를 지나는 이가 많아졌다. 등산객도 점점 늘었다. 최씨는 가진 것 없지만 등산객들에게 마실 것과 먹을 것을 내어놓기 시작했다. 올해로 31년, 조계산 보리밥집은 굴목재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명소가 되었다. 일부러 이곳 보리밥을 먹기 위해 찾는 등산객도 많다. “첨에 주위서 많이 도와줬제. 그래서 베풀고 살라고 하고. 산에 오는 사람 한 명 한 명 모다 식구같이 생각한당께. 식구가 뭔 줄 알어? 밥 같이 나눠 묵는 게 식구여.”

6∼9가지 채소와 함께 나오는 조계산 보리밥(사진)은 보는 것만으로 맛깔스럽다. 값은 6000원. 보리 잡곡밥에 고소한 참기름과 고추장 양념, 갖은 산나물을 넣고 쓱쓱 비벼 먹는 산채보리비빔밥은 입속에서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산나물이 고루 섞여 만들어내는 조화로운 맛도 좋지만, 통통한 보리밥 씹는 것도 재미나다.

기자명 박준배 (〈사랑방신문〉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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