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를 기억하는 제주 청소년 모임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70] 신선영 기자 제주 보물섬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세월호를 기억하는 제주 청소년 모임’의 김원 총대장(17), 김태은 홍보대장(17), 정한비 회원참여대장(17)은 3년째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두 달에 한 번 여객선의 안내방송과 탈출장치 등을 확인하는 ‘안전 모니터링’을 진행하고, 유가족을 초청해 간담회를 열기도 했다. 올해는 10주기를 맞아 제주에서 출발해 4월16일 안산까지 자전거로 이동하는 ‘자전거 순례단’ 프로그램도 계획 중이다.“이번이 세 번째예요. 8주기를 처음 준비할 때 ‘세월호 제주 기억관’ 신동훈 운 팽목성당 손인성, 김영례 부부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68] 신선영 기자 세월호 참사 당시 진도항(옛 팽목항)은 유해가 수습되고, 가족들이 오랜 시간 머물던 곳이었다. 2023년 새로 문을 연 진도항 여객터미널에서 300m가량 떨어진 주차장 부지에는 여전히 낡은 컨테이너로 된 팽목 기억관, 식당, 강당 그리고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손인성(76)·김영례(72)씨 부부는 10년째 매일 이 팽목성당을 지키고 있다.“천주교 광주대교구에서 팽목항에 성당을 세운 2014년 4월20일부터 저희도 이곳에서 미사를 시작했어요. 그때는 팽목항에 수백 명씩 오가던 때였어요. 처음에는 며칠 안에 해결이 되어서 기도가 끝날 2학년 7반 이민우 학생 아빠 이종철씨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66] 신선영 기자 고 이민우 학생이 속한 2학년 7반은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돌아오지 못했다. 이종철씨(55)는 세월호 참사 이후 1년이 넘도록 광화문광장을 지켰다. 생업을 제쳐두고 진상규명을 위해 삭발을 하고 농성을 했다. 그랬던 그가 돌연 광화문과 안산을 떠났다. 2015년 10월에 제주도에 정착한 그는 현재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광화문을 떠나 온 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어요. 다 잊고 살려고 했어요. 전국의 섬은 안 가본 데가 없어요. 마음을 정한 곳이 없었는데, 제주도에서 1년살이를 해볼까 하고 왔다가 여기 머물게 되었어요. 연고가 세월호 생존자 김주희씨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63] 신선영 기자 세월호 참사 생존자 김주희씨(27)는 참사 초기 언론의 오보를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에 공개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직접 경험한 사실이 왜곡 없이 사람들에게 전달되길 바랐다. 그는 대학 친구들에게 ‘단원고 특별전형’ 입학을 숨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기회를 준 학교에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학교생활에 임했다. 학과에서 처음으로 여성 학생회장을 맡기도 했다.“저는 공개적인 말을 할 때 ‘다른 친구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이라는 말을 자주 해요. 모두 다르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에요. 10년이 지나도 다 괜찮은 건 아니에요. 아직 힘든 친구 ‘치유공간 이웃’ 이영하 전 대표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62] 신선영 기자 2014년 9월 정신과 의사 정혜신·심리기획자 이명수 부부의 제안으로 안산에 ‘치유공간 이웃(이웃)’이 문을 열었다. 20년 차 시민단체 활동가이던 이영하 전 대표(50)는 유가족이 마음껏 와서 울고, 편하게 밥을 먹고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말에 주저없이 실무를 맡았다. 2021년 2월, 6년 5개월여 만에 이웃은 문을 닫았다. 실무자에서 대표로, 이웃의 처음과 끝을 함께한 그는 1년 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로 책 〈밥은 먹었어요?〉를 펴냈다. 현재는 안산에서 상담사로 일하고 있다.“안산 지역 활동가로 굉장히 열심 2학년 8반 임현진 학생 부모 이미숙씨, 임희민씨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61] 신선영 기자 2학년 8반 임현진 학생 엄마 이미숙씨(53)와 아빠 임희민씨(54)는 세월호 참사 1년 뒤 이사했다. 두 사람은 새집에서 아들의 방을 다시 만들었다. 방은 큰 가구 대신 성장과정이 담긴 사진 액자와 사용하던 물건으로 채워졌다.“가끔 현진이 방에 와서 사진도 들여다보고, 혼잣말도 하고 그래요. 외동아들이니까, 이렇게 저희와 같이 지내는 것처럼 꾸며놓고 지내요. 현진이가 용돈을 모아 사준 전자레인지를 지금도 사용하고 있어요. 점점 나이가 들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밝게 살다가 현진이에게 가야겠다고. 슬프게 지내면 아들도 엄마가 늘 10년을 걷고 다시 걷는다 [포토IN] 신선영 기자 10년 전 아이들이 도착했어야 할 수학여행지에 엄마·아빠들이 왔다. 2월25일 오전 세월호 참사 유가족과 시민들로 구성된 ‘세월호 참사 10주기 위원회’가 제주 성산일출봉 매표소 앞에서 긴 여정의 출발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첫 발언으로 2학년 1반 김수진 학생의 아빠 김종기 ㈔4·16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다가오는 10주기는 지난 10년의 마무리가 아닌, 앞으로의 10년을 이어가는 전환점으로 삼을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 10주기 전국 시민행진단의 첫 발걸음을 우리 아이들이 오고 싶어 했던 제주에 2학년 7반 이준우 학생 엄마 장순복씨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56] 신선영 기자 장순복씨(50)는 준우 이야기를 하면 얼굴빛이 밝아진다. 준우와 함께한 시간은 10년이 지나도 다 기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장씨는 세월호 가족과 일반 시민이 함께하는 4·16합창단에서 2016년부터 노래를 부르고 있다.“제가 집에서 노래하면 준우가 옆에서 잘 들어줬어요. 참사 이후에는 아이가 없는데 여전히 노래가 흘러나오는 게 싫었어요. 한동안 엄청 울었죠. 4·16합창단에서 〈너〉 악보를 받았을 때 못 불렀어요. ‘태어나던 날 처음 잡던 손. 목소리를 알아듣던 너. 세 살 적 기차 창에 매달려 세상을 바라보던 너. (중략) 열넷 ‘인권운동공간 활’의 상임활동가 기선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53] 신선영 기자 ‘인권운동공간 활’의 기선 상임활동가는 참사 직후 세월호참사 국민대책회의 소속 ‘존엄안전위원회’ 평등팀에서 활동했다. 4·16인권실태조사단이 꾸려진 뒤에는 유족, 생존자, 잠수사, 진도 어민 등을 만나 심층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피해자’의 범위와 슬픔의 위계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이후 재난과 참사에 관한 인권활동을 이어왔다.“인권활동을 하다 보면, 어디서든 ‘쉽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돼요. 세월호 참사는 저에게 애도와 기억에 관한 과제를 준 것 같아요. 참사를 겪을수록 모르는 게 더 많아지 2학년 4반 정차웅 학생 엄마 김연실씨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52] 신선영 기자 김연실씨(55)는 ㈔4·16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에서 활동했다. 회원 조직 사업을 했고, 팀장을 맡은 적도 있다. 혼자 나서는 일은 어려웠지만, 같은 경험을 한 유가족들과 함께하는 일은 가능할 것 같았다. 현재는 4·16합창단, 꽃마중(꽃 누르미 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있다.“참사 이후 첫째에게 말했어요. 그동안 너의 이름이 붙은 엄마 아빠로 살았는데, 앞으로 20년은 네 동생 차웅이의 엄마 아빠로 살게. 그렇게 불려도 괜찮겠지? 저는 첫째가 당연히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진상규명 활동으로 뉴스에 나오는 것도요. 첫째도 단원고를 노래 만드는 일터, 노들노래공장 [포토IN] 신선영 기자 “오늘은 뭐에 대한 노래를 만들어볼까요?” 2월19일 오후 노들노래공장(노노공)의 강사 만수씨(35·음악가 이민휘)가 노들장애인야학에 모인 중증 발달장애인 노동자 10명에게 물었다. ‘바다’ ‘친구의 마음’ ‘이사’ ‘고장’ 등 각자 떠오르는 단어들을 제안했다. 거수투표 결과 ‘바다’로 정해지자, 만수씨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바다 하면 뭐가 생각나요? 바다에 왜 가고 싶어요?” 후반부 가사를 지을 즈음, 바다 주제를 제안했던 황임실씨(47)가 화가 난다며 ‘아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가 안정을 되찾자 이윽고 가사가 정해졌다. 안양 노란리본 공작소 양승미씨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49] 신선영 기자 세 자녀를 둔 양승미씨(52)는 2014년 여름부터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리본을 만들었다. 한때 피켓을 들고, 특별법 서명도 도왔다. 현재 매주 목요일 ㈔4·16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에서 안양지역 사람들과 노란리본을 만들며 공간에 온기를 채워주고 있다.“세월호 참사가 났을 때 첫째가 열아홉 살이었어요. 첫 일주일 정도는 밖을 못 나갔어요. 말 그대로 세상이 정말 무서웠죠. 우리 아이들은 웃고 있는데, 한쪽은 울고 있으니까, 감정 조절이 힘들었죠. 내 자식이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귀하다는 걸 세상 엄마들을 다 알아요. 일주일쯤 지났나, 문 2학년 3반 유예은 학생 엄마 박은희씨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45] 신선영 기자 박은희씨(54)는 참사 이후 지금까지 희생된 아이들을 기리며 예배를 이어오고 있다. 안산 화랑유원지 분향소가 철거된 후 2018년 5월부터 생명안전공원 예정 부지에서 시민들과 함께 매달 첫 주 주일예배를 드린다.“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싸우면서 느끼는 게 있어요. 우리가 앞서서 가는 것 같지만, 아이들 뒤를 따라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이들이 못한 말을 하려고, 궁금해하는 질문에 답을 찾으려고 걸어온 길 같아요. 그래서 애들이 원하는 게 뭘까 늘 궁리하면서 살았어요. 세월호는 한국 사회에 선명한 선으로 남아야 한다고 생각해 음악가 하림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44] 신선영 기자 하림씨(47) 앞에는 다양한 수식어가 붙는다. 가수, 작곡가, 문화예술 기획자, 음악을 통한 사회운동가 등. 음악이 가진 역할을 고민해온 그의 궤적을 따라가 보면 오랫동안 사회적 약자 곁에 선 그가 있다. 이주노동자 무료 진료소에서 한 달에 한 번 ‘국경 없는 음악회’를 열고, 당진에서 숨진 20대 노동자를 기리는 곡 ‘그 쇳물 쓰지 마라’로 함께 부르기 열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안전한 일터를 꿈꾸는 후속곡 ‘우사일(우리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일을 합니다)’ 프로젝트를 통해 전태일 의료센터 건립 기금을 후원하고, ‘우사일 그 4·16 합창단 박미리 지휘자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43] 신선영 기자 4·16 합창단 박미리 지휘자(48)는 한때 음악 교사였다. 음악이 사회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고민하며 교직 생활을 정리했다. 이후 소속되어 있던 합창단이 세월호 참사 추모제 공연에 참여하면서 세월호 가족들과 인연이 시작됐다. 최근 10주기를 앞두고 창작곡으로 구성된 두 번째 앨범을 작업 중이다.“세월호 참사 이전부터 ‘평화의 나무 합창단’ 단원으로 활동했어요. 당시 안산 문화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추모제에서 공연했죠. 2014년 겨울, ‘네버엔딩스토리’ 뮤직비디오 제작을 도왔어요. 그때 세월호 가족분들께 처음 인사드렸 안산시 선부종합사회복지관 임남희 부장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41] 신선영 기자 선부종합사회복지관 임남희(56) 부장은 세월호 참사 직후 고잔복지센터에 만들어진 ‘힐링센터 0416 쉼과힘’의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10년 가까이 참사로 내상을 입은 마을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유가족과 주민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해왔다.“저는 안산에서 30년 넘게 살았어요.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대학원 논문을 준비 중이었죠. 세월호 참사 이후 단원고등학교 앞에 있는 선부종합사회복지관 분관 고잔복지센터로 발령을 받았어요. 2014년 9월15일 ’힐링센터 0416 쉼과힘’이 문을 열었을 때 초반에는 어려움이 있었어요. 유가족을 연분홍치마 김일란 감독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37] 신선영 기자 인권운동단체이자, 다큐멘터리 제작 집단인 ‘연분홍치마’ 김일란 감독은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아 영화 5편의 총괄 프로듀서를 맡았다. 유가족들의 10년을 되짚는 장편영화 〈바람의 세월〉, 극영화 〈목화솜 피는 날〉, 참사 보도와 유류품 그리고 희생자 친구들의 이야기를 다룬 각각의 옴니버스 영화 〈타이밍〉 〈흔적〉 〈드라이브〉가 제작되고 있다.“용산 참사를 다룬 〈두 개의 문〉 후속작인 〈공동정범〉을 제작하고 있었어요.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투쟁도 기록 중이었죠. 세월호 참사까지 기록하는 것에 대해 고민이 많았어요. 다른 활동가들 2학년 4반 최성호 학생 엄마 엄소영씨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36] 신선영 기자 세월호 엄마들이 모인 공방 꽃 마중(꽃 누르미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엄소영씨(48)는 참사 10주기를 맞아 희생된 아이들의 기억을 담은 작품 ‘너희를 담은 시간’을 만들고 있다. 오는 4월17일부터 5월3일까지 경기도 안산 문화예술의전당에서 전시가 열린다.“방학이 되면 성호와 함께 남편이 일하는 말레이시아에 가기로 했었어요. 티켓을 끊어놓았는데 결국 못 갔죠. 성호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많았어요. 2018년에 남편과 둘이서 아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장소를 다녔어요. 셋이 가는 기분을 내려고 성호 사진을 목에 걸었죠.성호는 외동이었어 2학년 1반 김주아 학생 엄마 정유은씨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34] 신선영 기자 정유은씨(53)는 세월호 참사 후 몇 개월 동안 집 밖을 나가지 못했다. 참사 이후 정씨는 숨어 지냈다. 자신과 같은 유가족이 있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 활동에 참여했다. 근래에는 ‘4·16공방’과 ‘4·16희망목공협동조합’에서 활동하고 있다.“주아 생일이 4월10일이에요. 수학여행 가기 전에 생일상을 차려줬어요. 미역국을 주면서 주아에게 그랬어요. ‘오래오래 살라고 미역을 자르지 않고 주는 거야.’ 저는 아직도 21세기에 이런 참사가 가능할까,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이 그 안에서 죽을 수 있나 믿기지 않아요. 2학년 1반 김민지 학생 아빠 김내근씨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32] 신선영 기자 김내근씨(53)는 ㈔4·16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에서도 근면하기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현재 2학년 총 반대표를 맡고 있다. 그는 참석하지 못하는 다른 유가족을 대신해 팽목지킴이와 재판 방청 등 다양한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저에게 세월호 참사는 암흑의 시작이었어요. 아직도 그 암흑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 같아요. 모든 게 어긋나기 시작한 거죠. 한 4년 동안은 매일 아침 하늘공원으로 가서 딸을 본 다음 가족협의회 사무실로 왔어요. 어느 순간 가는 게 어렵더라고요. 자식이 거기에 있다는 걸 계속 마주하는 게 힘들었어요.화랑유원지 분향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