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겨울 밤, 암퇘지 한 마리가 몸을 풀었다. 갓 태어난 아기 돼지 오남매는 서로 엉겨 올망졸망 어미 품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허락된 시간은 단 하루. 세상 빛을 본 지 이틀 만에 이들은 어미와 함께 땅 속에 매몰돼 죽음을 맞아야 한다. 

지난 1월 12일 새벽,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자연농업 이장집’에서는 기쁨과 슬픔이 교차했다. 다음날 이뤄질 ‘구제역 돼지 예방 살처분’을 앞두고 새끼 돼지 다섯 마리가 태어난 것이다. 2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다른 돼지 농장에서 구제역이 발생한 게 화근이었다. 반경 500m 안에 들어오는 농가의 소·돼지는 무조건 ‘예방’ 차원에서 살처분해야 한다고, 11일 농장을 찾아온 면사무소 공무원이 통보했다. 

ⓒ김재연 인턴기자

이제껏 많은 축산 농민들이 ‘자식처럼 키우던’ 가축들을 구제역 살처분으로 잃었지만, 농장 주인 김정호씨(53)의 마음은 유독 더 애탔다. 평소 공장식 축산 방식이 구제역 등 가축 질병을 심화시킨다는 지론 아래 소규모·친환경 축산을 고집하며 키워온 돼지들이었다. 수입 GMO 사료 대신 손수 벤 봄풀과 음식 찌꺼기로 만든 발효사료를 먹였고, 앉고 서는 동작 외엔 허용되지 않는 ‘효율적 돈사’ 대신 돼지가 뛰어다닐 수도 있는 넓은 공간을 마련해 줬다. 햇빛과 바람이 잘 통하는 ‘이장집’ 돈사는 그래서 여느 돈사와 달리 냄새조차 나지 않는다. 

김씨는 또 돈사에 형광등도 달지 않았고, 해 뜨기 전에는 돈사 근처를 얼씬하지도 않았다. 예민한 돼지가 행여 잠을 설칠까 걱정되어서였다. 그렇게 키운 김씨의 돼지 50여 마리는 이제껏 한 번도 병치레를 하지 않았다. 병은 약이 아니라 면역으로 맞서야 한다는 그의 지론이 성공한 것이다. 김씨는 친환경 축산 농법 덕분에 강해진 면역력이 이제껏 그의 돼지를 지켰다고 믿었다.

하지만 대규모 축산 산업의 모순이 낳은 이번 구제역 광풍은, 면역력을 높인 김씨네 돼지 50마리의 목숨마저 ‘예방적 살처분’이라는 이름 아래 앗아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애초 12일로 예정돼있던 살처분은 매몰지를 찾지 못해 다음날로 미뤄졌다. 돼지들은 살아있는 시간을 하루 벌었지만 김씨의 답답함은 풀리지 않았다. “차라리 오늘 데려가 버리지, 오늘 밤도 꼬박 새겠네.” 김 씨는 지난 일주일 잠을 거의 이루지 못했다. 

ⓒ김재연 인턴기자
지난해 11월 안동에서 시작된 구제역 사태로, 1월12일 현재까지 가축 142만 마리가 살처분됐다. 김씨의 농장이 위치한 경기 파주시 적성면에선 스물여섯 농가의 돼지 2만9000마리가 땅에 묻혔다. 김씨네 돼지 50마리는 마지막 순번이다. “어차피 우리 돼지 밖에 안 남았는데, 어디에 병을 옮긴다고.” 아들 김제화(30)씨가 불평했다.

1월12일 오전 아홉시, ‘이장집’ 주인 김씨가 돈사로 나왔다. “죽을 놈들한테 뭐 밥을 주려고 그래?” 매형 염동선씨(55)가 괜히 딴죽을 걸었다. “그럼 굶겨?” 맞받아치며, 김씨는 돼지들의 마지막 날 식사가 될 지도 모르는 사료를 퍼냈다. 그의 눈이 가로누워 씩씩대는 어미돼지를 향했다. 내일 죽을 새끼돼지들이, 힘차게 젖을 빨고 있었다.

기자명 방준호 인턴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