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 오오오~~ 기브 미 프리덤, 기브 미 파이어 기브 미 리즌~~.” 축구는 끝났지만 노래는 남았다. 올해 남아공 월드컵을 본 사람 가운데는 이 구절을 절로 외운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사실상 월드컵 주제가가 되어버린 이 노래의 제목은 ‘깃발을 흔들며(Wavin' Flag)’. 아프리카 특유의 토속적인 리듬감에 어깨춤이 덩실 나올 것 같은 흥겨운 곡이다.

이 노래는 월드컵 기간 내내 텔레비전을 통해 울려 퍼졌다. 최소 11개국 이상에서 음반 판매 순위 1위를 차지했다. 이 노래를 부른 캐나다 국적의 가수 케이난은 ‘부부젤라’와 ‘문어 파울’과 함께 남아공 월드컵이 낳은 3대 스타로 뽑혔다. 한 축구 게시판에는 “명승부 장면보다 월드컵 주제곡 가락이 더 여운이 남는다”라는 글이 올라왔다.
 

‘깃발을 흔들며’의 원래 가사는 정치적 메시지를 강하게 담고 있다. 지난 1월 아이티 대지진 때 캐나다의 젊은 음악가 54명이 모여 구호 기금 마련 운동을 벌였는데, 그 운동의 주제곡이 케이난(왼쪽)의 ‘깃발을 흔들며’였다.


‘깃발을 흔들며’는 FIFA가 지정한 월드컵 공식 주제곡이 아니다. 다만 월드컵 공식 후원사인 코카콜라의 테마곡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주제곡보다 더 유명해졌다. ‘챔피언’ ‘뷰티풀 게임’ 등 축구를 암시하는 극히 쉬운 단어로 채워진 가사는 얼핏 심오함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코카콜라가 원하는 수준의 대중적인 응원가로 손색이 없다.

하지만 이 ‘사실상 월드컵 주제곡’ 뒤에는 슬픈 사연이 숨어 있다. 여기에는 가수 케이난의 영화 같은 개인사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의 아픈 현대사도 깔려 있다. 그리고 애잔한 감동이 있다.

올해 32세인 케이난이 2009년에 발표한 ‘깃발을 흔들며’ 원곡은 코카콜라 리믹스 버전과는 사뭇 다르다. 더 느리고 더 서정적이지만 무엇보다 가사를 보면 깜짝 놀란다. ‘깃발을 흔들며’ 원곡 가사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초략) 수많은 전쟁과 복구의 반복/ 약속을 던지고, 가난을 남겼지/ 그들은 말했지. “사랑이 길이다”/ “사랑이 답이다”라고 말했지/ 하지만 그들이 우리를 어떻게 다뤘는지를 봐/ 우릴 신도로 만들었어/ 그들의 전쟁에 참가했지만, 기만을  당했네/ 우리를 조종하려 했어/ 하지만, 그들이 우리를 지배할 순 없어/ 우린 버팔로 군인처럼 앞으로 전진할 뿐이니까/ 먹기 위해 싸우고 투쟁하고/ 언제 자유로워질지 의심한다 / 운명의 그날을 위해 참고 기다린다/ 지금, 그날은 멀지 않다 (이하 생략).’

무슨 사연이 있기에 이토록 비장한 것일까. 케이난은 실은 소말리아 출신 이민자다. 1978년 모가디슈에서 태어난 케이난은 유명한 가수인 고모와 시인인 아버지에게 예술적 감각을 배웠다. 열 살 때 자동차 라디오에서 힙합을 듣고 반해버렸다는 케이난은 음악을 사랑하는 소년이었다. 그리고 조국을 사랑했다. 그의 출세곡 ‘깃발을 흔들며’의 첫 소절에서 그는 소말리아를 한때 “로마보다 강했”던 나라로 묘사한다.

케이난이 열세 살이 되던 1991년, 소말리아는 내전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살육 현장을 케이난은 직접 목격했다. 골목에서 같이 놀던 친구 두 명이 난데없는 총격에 그 자리에서 숨진 것이다.

케이난은 그날의 기억을 ‘깃발을 흔들며’  노래 랩 버전에 삽입했다.

‘친구들과 모가디슈의 거리를 걸었네/ 무더운 날씨/ 해변에서 여자들을 만났지/ 코너를 돌았는데 죽음의 냄새/ 탱크 두 대가 나타나서/ 우리에게 쐈어/ 친구 둘을 죽였어// 집으로 도망쳤어// 충격에 빠져 있었어/ 어머니가 날 때리고는 껴안고 키스했어/ “넌 죽고 싶니, 난 울고 싶다”// 내가 어른이 되면/ 난 강해질 테야.’

어린 시절, 학살 순간 목격

이 사건 이후 케이난 가족은 소말리아를 떠나 뉴욕으로, 다시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소말리아는 20년이 다 가도록 내전이 멈추지 않았고 케이난은 소말리아로 돌아갈 수 없었다. 에티오피아와 미국 등 외세가 개입하면서 나라는 자주성을 잃어갔다.

 

 

ⓒFlickr월드컵 개막 전야제 때 케이난(오른쪽 사진 왼쪽 두 번째)은 소말리아 국기를 흔들었다.


낯선 환경에 영어도 잘하지 못했던 그는 악조건을 이기고 캐나다에서 힙합 가수가 된다. 그는 일관되게 아프리카와 소말리아의 아픔을 음악에 담았다. 소말리아어로 케이난은 ‘여행자’라는 뜻이다. 〈아프리카의 길〉〈소말리아〉〈아프리카의 뿔〉 등 케이난의 노래는 저항시와 같았다.

케이난은 2006년 ‘쥬노 올해의 랩  부문 대상’을 타면서 서서히 음악성을 알리더니 2009년 〈깃발을 흔들며〉로 일약 스타가 된다. 캐나다 음반 순위 2위에 오르며 대중과 평단의 격찬을 받았다. 일부 평론가는 그를 ‘밥 말리의 영혼과 에미넴의 감각을 갖춘 음악가’라고 평가했다. 그의 개인사가 알려지며 감동한 사람들은 그의 팬이 됐다. 케이난은 2009년 뉴욕 유엔 본부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깃발을 휘날리며’가 인류애를 상징하는 노래가 된 것은 2010년 1월 아이티 대지진이 계기였다. 이때 캐나다의 젊은 음악가들이 모여 구호기금 마련 앨범을 제작하기로 한다. 한국인에게 친숙한 에이브릴 라빈을 비롯해 뮤지션 54 명이 모여 합창한 노래가 바로 ‘깃발을 흔들며’였다. 구호 기금 앨범 뮤직비디오에서 이 노래의 후렴구 “내가 어른이 되면, 강해지고 말 테야”는 아이티 아이의 눈망울을 담은 영상과 함께해 캐나다인의 눈시울을 적셨다.

코카콜라가 케이난의 곡을 월드컵 테마송으로 선택한 것은 이런 배경이 작용한 듯하다. 저항 음악가 케이난이 다국적기업 코카콜라의 리믹스 개사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다소 아이러니한 면이 있다. 아무튼 그 덕분에 케이난의 곡은 캐나다를 넘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됐다. 케이난은 상업성에 물들었다는 비판에 대해 “나는 코카콜라와 아무런 일도 같이 한 적이 없다. 나는 음악만 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6월10일 요하네스버그에서 남아공 월드컵 개막 전야제가 열렸다. 이날 밤 케이난은 작심한 듯했다. 개사한 축구 응원가 앞뒤 부분에, 비감한 원곡의 가사를 이어 붙인 것이다. 오른손에는 푸른 바탕에 흰 별이 그려진 소말리아 국기를 당당하게 쳐들었다. 전 세계에 소말리아의 메시지를 알렸다. 마지막 후렴을 부를 때 그의 목멘 소리가 들렸다. “내가 어른이 되면, 난 강해질 테야. 그럼 그들은 날 자유라고 말하겠지. 나부끼는 저 깃발처럼.”

 

 

기자명 신호철 기자 다른기사 보기 shi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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