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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나온 책 - 플라이 백

시사IN 편집국 webmaster@sisain.co.kr 2019년 02월 22일 금요일 제59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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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어슐러 K. 르 귄 지음, 진서희 옮김, 황금가지 펴냄

“하지만 부디 저 문장이 아니기를 바란다.”


여든이 넘은 판타지 문학의 거장은 티셔츠를 만드는 회사에서 인용문 하나를 사용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창의적인 어른은 살아남은 어린이다.” 르 귄은 생각한다. ‘내가 저런 문장을 썼던가? 어른들 중에 누군들 살아남은 어린이가 아닌 어른이 있던가?’ 이 문장이 영 마뜩지 않았던 그는 이 인용의 기원에 대해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은 댓글을 달아달라고 요청한다. “6월부터 계속 신경 쓰이게 만들었던 일이랍니다.”
지난해 88세로 타계한 어슐러 르 귄이 2010년부터 2014년까지 블로그에 쓴 글 40여 편을 모았다.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특유의 재치와 통찰은 짧은 에세이에서도 번뜩인다. 2010년 10월, 시작하는 글에서 그는 블로그에 대해 이렇게 쓴다. “콧구멍을 가로막은 장애물 이름으로 그럴싸하다.”



플라이 백
박창진 지음, 메디치미디어 펴냄

“난 더 이상 그들이 나의 존엄성을 훼손하게 놔둘 수 없다.”


‘피해자다움’은 비탄에 젖은 모습과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모습, 두 극단을 강요한다. ‘땅콩회항’ 피해자 박창진 대한항공 전 사무장은 무너져 침잠하거나 아무렇지 않은 듯 툭툭 털고 일어서지 못했다. 다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좌절할지라도 품위를 잃지 않고 모욕을 견뎌가며 버텼다.
저자는 자기에게 벌어진 숙명을 거부하는 대신 이를 바로잡기 위해 사투한 시간을 기록했다. 그사이, 그는 노조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회사를 떠나야 했던 동료와 재회했고, ‘조현민 물컵 갑질’ 사건이 벌어지자 자신을 손가락질하던 동료들을 도왔다. 조직에서 살아남으려 애쓰던 노동자이자 ‘갑질’ 사회에 투쟁해온 개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린다. 그가 감당한 현실을 보면, 그에게 미안하다.



젤다
젤다 피츠제럴드 지음, 이재경 옮김, 에이치비프레스 펴냄

“어떤 페이지에선 결혼 직후 사라진 제 옛날 일기의 일부가 보여요. 표절은 집안에서 시작된다고 믿나 봐요.”

표지가 일단 눈길을 끈다. ‘젤다’라는 원래 이름만 남고 ‘피츠제럴드’라는 남편의 성은 거의 지워졌다. 젤다는 지금껏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아내로만 알려졌던 사람이다. 누군가에게는 남편의 뮤즈로 불렸으며, 누군가에게는 남편의 재능을 시기하고 방해하는 정신 나간 여자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정작 피츠제럴드는 <아름답고 저주받은 사람들>과 <젤리 빈> <밤은 부드러워> 등에 젤다의 글을 그대로 베껴 넣곤 했다. 한 출판사가 젤다의 글을 묶어 책을 내자고 했을 때 거절한 것도 피츠제럴드였다. 젤다가 남긴 소설과 산문을 묶은 이 책은, 누군가의 아내가 아닌 그 스스로가 재능 있는 작가이자 주인공이었음을 조명한다. 책의 부제는 ‘젤다의 편에서 젤다를 읽다’이다.



뮤지컬 탐독
박병성 지음, 마인드빌딩 펴냄

“관점을 집중시켜야 한다. 돋보기의 소실점처럼.”


공연예술 장르 중 요즘 가장 활황인 곳이 뮤지컬이다. 관객이 몰리고 관객이 몰리니 돈이 몰리고 돈이 몰리니 관심도 몰린다. 하지만 본격 뮤지컬 비평은 많지 않다.
뮤지컬은 평하기도 쉽지 않다. 연기만큼 노래 실력도 중요하고 스토리만큼 무대 시설도 중요하다. 뮤지컬이 종합예술이라 여러 가지를 복합적으로 판단해서 평해야 하기 때문이다. 박병성 전 <더 뮤지컬> 편집장은 관점을 집중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작품의 내적 원리를 깊이 들여다보아야 뮤지컬을 제대로 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스테디셀러 뮤지컬에 집중했다. 총 21편을 골랐다. 각각의 작품에서 뮤지컬 넘버(수록곡)가 가진 의미를 가사에 내포된 의미, 조성이나 화음 등을 통해 종합적으로 분석했다.



원본 초한지 1~3
견위 지음, 김영문 옮김, 교유서가 펴냄

“백성은 밥을 하늘로 삼는다.”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의 싸움이 한(漢)의 통일로 이어지는 과정은 중국사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 가운데 하나다. 장기판의 두 축인 초(楚)와 한(漢), 한국에서 일상 어휘로 사용되는 사면초가(四面楚歌), 토사구팽(兎死狗烹), 분서갱유(焚書坑儒) 등 고사성어가 두 군벌의 쟁투에서 비롯되어 동아시아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초한지’는 수많은 축약이나 번안으로 소개되어 왔는데, <원본 초한지>는 그런 작품의 원본이라 할 수 있는 ‘서한연의(西漢演義)’를 국내 최초로 번역한 책이다. 옮긴이는 ‘서한연의’가 정사(正史)와 다르거나 오류를 범한 부분에 대해 상세한 각주를 달고, 각종 초한지에서 누락된 원전의 삽입 시와 삽화도 수록해 고전의 맛을 제대로 전달하려 했다.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권정자 외 지음, 남해의봄날 펴냄

“글을 아니까 어디를 가도 겁이 안 납니다.”

몇 페이지 만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표지만 보고 그림책으로 착각했던 이 책의 저자는 순천에 사는 할머니 스무 명이다. 팔순을 앞두고 글을 배웠고 비로소 자신의 삶과 일상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2남2녀 중 첫째 딸로 태어난 손경애 할머니는 젊을 때 이미자를 흉내 내며 노래 부르길 즐겼다. 한 동네 사는 오빠가 손을 잡았는데 마음에는 안 들었지만 손을 잡으면 결혼해야 되는 줄 알았다. 형편이 어려워 도시락 반찬으로 ‘덴푸라(튀김)’를 자주 싸줬는데 말없이 먹던 딸들이 커서 지금은 튀김을 쳐다도 보기 싫다고 해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치매 앓는 시어머니의 대소변을 받아내던 그는 어버이날이 되면 시어머니가 불쌍해 꽃을 달아준다. 간단한 문장으로 덤덤하게 이어지는 각자의 삶이 그 자체로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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