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슐츠. 1987년 봄, 민주화 시대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이름이다. 당시 레이건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 방한해 비상계엄령 선포와 호헌을 꾀하던 전두환 정권에게 압박을 가해 한국의 민주화 이행에 공헌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경제학자 출신인 슐츠는 닉슨 행정부에서 노동장관을 필두로 예산실장과 재무장관, 그리고 레이건 행정부에서는 국무장관을 7년이나 지냈다. 그래서 미국 내에서는 그를 ‘행정의 달인’으로도 부른다.

얼마 전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개최된 한 회의에서 그를 접할 기회가 있었다. 96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단한 노익장을 과시했다. 이틀 내내 자리를 지키면서 적극적으로 토론에 참여하던 그의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특히 그가 제시한 북한 핵문제 관련 세 가지 해법은 참으로 간결하면서도 탁월했다. 첫째, 북한에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라. 둘째, 북핵 문제에 좀 더 현실적인 입장을 취하라. 마지막으로 서로가 수용 가능한 의제들을 유연하게 설정하라. 구체적 내용은 없었지만 그가 제시한 큰 얼개만으로도 북핵 문제 해결에 주는 함의는 커 보였다.

그의 해법을 각론적으로 복기해보자. 사실 한국과 미국은 그동안 북한에 상충되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한편으로는 대화와 협상을 통한 북핵 문제 타결이라는 방식을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이 비핵화에 대한 구체적 행보를 보이지 않는 한 제재와 압박, 고립과 봉쇄를 통해 북한 체제를 바꾸어놓겠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선제 조건이 있는 대화에도 나서기 꺼려하는 북한이 자신의 체제 변화를 바라는 미국·한국을 대상으로 대화와 협상에 나설 이유가 없어 보인다. 따라서 북한에 명확하고 일관된 메시지를 보낼 필요가 있다.

북한에 좀 더 ‘현실적 입장’을 취하라는 슐츠의 주문에 대해서도 이런 해석이 가능해 보인다. 북한이 핵무기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한 대화와 협상을 할 수 없다는 접근 방식은 다분히 비현실적이다. 미국의 군사적 위협 또는 핵 위협을 실재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북한으로서는 핵무기를 하나의 ‘헤징(위험 회피)’ 자산으로 간주해 외부의 압력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마지막 단계까지 이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 때문에 단기적으로는 북한 핵 무장력 증강이라는 상황 악화를 막고, 중·장기적으로 북핵 문제를 풀어나가자는 것이 바로 이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저명한 핵 과학자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가 대표적으로 이 시각을 표방하고 있다. 그는 ‘No more, No better, No export’라는 ‘스리 노(Three Noes)’를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바꾸어 말하면 북한이 핵물질과 핵탄두의 추가 획득은 물론 더 이상의 핵실험과 미사일 시험 발사를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no more) 동시에 핵탄두의 소형화·경량화 등을 통한 핵무기의 고도화를 막아야 한다(no better)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이 제3국에 대한 핵무기 확산 방지(no export)에 주력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마지막으로 유연한 의제 설정이다. 사실 6자회담이 현재 난항을 겪는 것도 의제 설정 문제라고 볼 수 있다. 한국과 미국은 북한의 전면적 비핵화를 요구하는 반면, 북한은 한·미 연합 군사훈련 중지, 미국 전략 핵무기의 한반도 배치 중단, 북·미 평화협정 체결, 우주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위성 발사 권한 인정 등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쌍방 모두 상대방의 의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방침을 취하고 있다.

“어떤 의제도 터부시하지 말고 협상 의제로 내놓자”

여기서 슐츠 장관의 ‘유연한 의제 설정’ 제안과 관련, 최소한 두 가지에 대해서는 관련 당사국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 하나는 지난해 1월9일 북한이 미국에 제안했던 한·미 연합 군사훈련 잠정 중단과 북한 핵실험 및 미사일 시험 발사 모라토리엄 간의 교환이다. 다른 하나는 북·미 간 평화협정 체결과 우주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인공위성 발사 권한 용인 등 북한이 줄곧 주장해온 의제에 전향적으로 대응하고, 그에 대한 반대급부를 요구하는 방안이다. 쉽게 말해 그 어떤 의제도 터부시하지 말고 협상 의제로 내놓자는 것이다.

임기 말의 오바마 행정부, 강경 일변도의 박근혜 정부, 그리고 핵·경제 병진정책이라는 환상에 집착하는 북한 정권 등을 감안할 때 상황은 그리 녹록하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이런 ‘강대강’ 대결 구도는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고, 잘못하면 ‘상호 보장된 파멸’로 이끌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조지 슐츠의 현실주의 해법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자명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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