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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바람 부는 조선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선 해운 구조조정 길을 잃다

 

 

외환위기 이후 20여 년 만에 ‘구조조정’이 한국 사회의 핵심 키워드로 다시 떠올랐다. 발원지는 조선업과 해운업, 그중에서도 조선업이다. 만성적 공급 과잉에 시달리는 조선업은 사내 하청 등 ‘취약 노동계층’을 중심으로 이미 고강도 인력 감축이 진행 중이다(‘칼바람 부는 조선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기사 참조). 산업 차원의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이 나온다면, 조선업 거점 도시인 경남 울산·거제·통영 등을 중심으로 대규모 실업 대란이 예상된다.

‘조선업 빅 3’로 불리는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은 지난해 셋이 합쳐 영업손실 6조원을 기록했다. 전통적인 선박 건조 사업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수요가 줄어든 데다 중국의 저가 공세에 포위되어 수익성이 나빠졌다. 위기에 대응해 조선업계는 수익성이 높은 해양플랜트(바다에 매장된 석유 등을 시추하는 해양 구조물) 산업에 진출해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해양플랜트 분야는 기술력이 충분히 축적되지 못해 가격경쟁으로 내몰리던 와중에 유가 하락으로 수요도 얼어붙었다.

ⓒ대우조선해양 제공거제 등 조선업 밀집 지역은 사내하청 등 취약 노동계층을 중심으로 인력 감축이 진행 중이다.

이 위기는 일시적일까, 구조적일까. 경기 악화에 따른 일시적 현상이라면 비상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버티는 전략이 답일 수 있다. 하지만 구조적인 위기라면 버틸수록 더 큰 위기를 불러오는 꼴이 된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예측은 엇갈린다.

“최소한의 구조조정으로 버티자”는 주장의 핵심 근거는 조선업 특유의 속성이다. 조선업은 글로벌 경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업종이다. 호황으로 해상운송 수요가 많아지면 조선업도 따라 호황을 누린다. 그 호황을 타려면 기술력과 노하우를 축적한 노동력을 최대한 잔존시켜야 한다. 게다가 조선업은 대규모 고용을 창출하는 산업이다. 경남 거제는 사실상 조선업 단일 업종 도시이고, 동남해안 일대에는 거대한 조선업 벨트가 형성되어 있다. 노동집약 산업인 조선업의 총 고용인원은 20만명에 달한다.

반대로 “구조적 위기에 적극 대응하자”는 주장도 조선업 특유의 속성을 이유로 든다. 조선업은 소비재 산업이 아니라 자동차 산업처럼 브랜드 가치가 큰 위력을 발휘하지는 않는다. 기술력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항공산업처럼 절대적이지는 않다. 경기변동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수요자들의 성향도 ‘도박사’에 가까워 미래 예측이 더 어렵다. 근본적으로 조선업을 선진국형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볼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선진국 중에 조선업을 주력으로 삼는 나라는 거의 없고, 대체로 후발 국가들이 한국 조선업의 경쟁 상대다. 일본이 우리에게 조선업을 넘겨주었듯 중국에 밀려날 시기가 다가온 것이 위기의 본질이라면, 해양플랜트 진출은 단지 위기를 타개해보려다 악화시킨 것일 뿐 본질은 아니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큰 그림으로 보면, 글로벌 불황과 중국의 도전에 맞서 조선업을 한국의 주력 산업으로 계속 끌고 가면서 ‘빅 3’를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조선업이 우리의 발전 단계와 어울리지 않는 산업이라 보고 사이즈를 줄여나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금융권에서 활동하는 시니어급 이코노미스트의 논평이다. 그래서 이것은 국가적 전략의 문제가 된다. 더욱이 3대 조선회사 중에서도 가장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는 대우조선해양은 16년 동안 산업은행이 대주주로 있다. 사실상 공기업이나 다름없고, 정부의 판단에 따라 운명이 갈릴 처지다. 이렇게 해서 조선업 구조조정 문제는 시장에서 정치로 ‘경기장’이 바뀐다.

박근혜 대통령은 4월26일 언론사 보도·편집국장 초청 간담회에서 “한국형 양적완화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라고 밝혔다. 총선에서 강봉균 새누리당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이 제시했던 정책 의제를 되살렸다. 4월28일 국무회의에서는 한 발짝 더 나아갔다. 박 대통령은 “기업 구조조정을 지원하기 위해 필요한 재원은 꼭 필요한 부분에 지원이 이뤄지는 선별적 양적완화 방식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복잡한 논의가 진행 중이지만 가장 알기 쉬운 한국형 양적완화 모델로는 산업은행이나 수출입은행과 같은 국책은행에 한국은행이 직접 출자하는 방식이 있다. 이들 국책은행은 대우조선해양을 비롯한 조선업 주식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사실상 발권력을 동원해 특정 기업 또는 업종에 구조조정 자금을 공급하는 셈이어서 논란이 일었다. 대표적인 반대론자인 이성태 전 한국은행 총재는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이름만 양적완화일 뿐 정책금융의 부활이다. 특정 대기업을 지원하는 데 증세와 유사한 효과를 갖는 발권력을 동원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표현은 양적완화지만 본질은 구제금융이다”

조선업을 주력 산업으로 끌고 가겠다는 것일까, 아니면 적절한 수준으로 규모를 축소하겠다는 것일까. 앞서의 이코노미스트는 “지금 국책은행이 대우조선해양에 물린 돈은 사실상 못 받을 돈으로 시장에서는 간주하고 있다. 여기에 한국은행까지 물고 들어가자는 것인데, 이건 조선업에 대한 전략적 접근이 아니라 ‘내 임기 중에 터지는 것만 막자’는 폭탄 돌리기에 가깝다”라고 말했다. 전략적 기조가 불투명한 채로 돈만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시사IN 조남진새누리당과 더민주에서 경제통 역할을 하는 강봉균 선대위원장과 김종인·최운열 당선자(왼쪽부터).

시장과 정권은 위기에 대응하는 방식이 다르다. 정권은 임기 이후에 터질 부실 폭탄 위협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경향이 있다. 조선업이 밀집한 동남부 해안 산업 벨트는 집권당의 핵심 텃밭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부산·울산·경남에서 사실상 참패했다. 공업 벨트 지역의 고용 불안 문제가 새누리당 응징 투표로 이어졌다는 분석도 나오는 터라 조선업 부실 위험을 과감하게 도려내기가 더 어렵다.

더불어민주당이 경제통으로 영입한 주진형 전 국민경제상황실 부실장(전 한화증권 사장)은 전문 경영인 출신으로, 구조조정 전문가다. 그는 정부가 추진하는 구조조정 전략을 이렇게 평가했다. “구조조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주·채권자·직원 등 이해 당사자가 공적자금 투입을 전제로 게임을 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도덕적 해이가 발생한다. 그런데 지금 정확히 그 길로 가고 있다. 양적완화라는 표현을 쓰지만 본질은 구제금융이다.”

구조조정 이슈를 맞은 더민주의 대응도 결이 여럿 중첩되어 있다. 구조조정 사례를 여러 번 다루어본 주진형 전 부실장은 “구조조정은 채권단과 경영진과 직원이 고통분담 계획을 가져오고, 그걸 본 정부가 필요할 경우 지원 계획을 짜고, 그걸 다시 국회로 가져오는 순서로 진행되는 것이 맞다”라고 말했다. 야당의 역할은 가장 마지막에야 등장하니, 시장에 엉뚱한 신호를 보내지 말고 해당 기업과 정부의 안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는 의미다.

반면 좀 더 적극적인 ‘큰 그림’을 그려서 치고 나가야 한다는 움직임도 있다. 더민주의 또 다른 경제통 영입 사례인 최운열 당선자(비례대표)는 정부가 실업대책 등 사회안전망을 강화한다면 구조조정에 협조할 뜻이 있다고 공세적으로 의제를 던졌다. 우선은 임금 조정과 같은 온건한 구조조정을 뜻한다고 했지만, 조선업의 현황을 보면 인적 구조조정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는 관측이 많다.

최 당선자는 또 이명박 정부 시절 대규모로 감세했던 법인세를 정상화하자는 주장도 들고나왔다. 논리적으로 두 사안이 직접 이어지지는 않는다. 법인세는 용처를 특정하고 걷는 목적세가 아니다. 최 당선자는 언론 인터뷰 등에서 법인세 정상화로 걷는 추가 세수를 사회안전망 강화에 쓰자는 논리를 폈다. 즉, 노동자는 일정 정도 구조조정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고통을 분담하고, 정부는 실업 문제를 사회안전망으로 완충하고, 대기업은 법인세를 더 내서 재원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고통을 분담한다. 일종의 사회적 대타협 모델이다. 고용 보호 문제에 민감했던 기존 야당에서 듣기 힘들었던 목소리가 20대 총선 이후 등장한 셈이다.

이 모델은 노동시장이 이중구조로 분절된 현실에서 장기적으로 의미 있는 모색이라는 평이 나온다. 조선업 위기를 계기로 상시적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과 임시·일용직 노동자에게 안전망을 제공할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진보 성향의 노동사회학자인 정이환 교수(서울과학기술대)는 “위기는 역설적으로 사회적 대타협을 이뤄낼 기회일지도 모른다. 노동과 자본이 한발씩 양보하는 방안은 평소라면 잘 작동하기 힘들지만, 조선업 쇼크와 같은 급격한 위기 국면에서는 오히려 고려해볼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신선영경남 거제시 옥포조선소의 퇴근 풍경. 총선에서 부산·울산·경남의 고용 불안 문제가 새누리당 응징 투표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구조조정 이슈에 또 ‘노동 4법’ 꺼내든 여권

그러나 사회적 대타협 모델은 당내에서도 여러 비판에 시달린다. 우선 이와 같은 ‘큰 그림’이 당장 위기를 수습할 단기 처방과는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시장에 잘못된 신호를 보내 위기 극복에 방해가 된다는 지적이 있다. 반대 방향에서는, 이 사회적 대타협 모델이 고용 유연성 증가를 암시하므로 고용 안정성을 중시하는 야당이 내놓을 정책이 아니라는 반론도 등장했다. 사회적 대타협 모델과 고용 안정을 강조하는 모델의 충돌은 장기적으로 더민주 내부의 노선 갈등으로 비화될 가능성도 있다.

정부·여당이 내놓는 실업 대책은 무엇일까. 청와대는 이른바 ‘노동 4법’을 다시 들고나왔다. 파견법·근로기준법·고용보험법·산재보험법 개정안이 통과되어야 일자리가 늘어나고 사회안전망이 강화되며, 그래야만 구조조정으로 발생할 실업을 흡수할 수 있다는 논리를 구성했다. 파견법에 대한 여야 이견이 워낙 커서 19대 국회에서 협상 타결에 실패한 안건을 구조조정 이슈에 끼워 다시 제시한 것이다. 시장 관찰자들 사이에서는 “지나치게 멀리 돌아갔다”라는 냉소적인 반응이 많다.

조선업에 대한 국가 전략은 기간산업 유지일까, 다운사이징(축소)일까. 지금까지 정부가 보여준 신호는 대체로 혼란스러우며, 국가 전략 차원보다는 임기 내 위기관리 차원에서 접근한다는 징후를 시장 참여자들이 관찰하고 있다. 앞서의 이코노미스트는 위기를 계기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런 식의 구조조정은 앞으로도 있을 수밖에 없다. 가장 바람직한 경로는 이번을 계기로 구조조정 이후의 고용 문제에 대해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져서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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