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서럽고 서러운 셋방살이 분투기


집주인 ‘갑질’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2013년 9월29일, 나하나씨(34)는 서울 은평구의 15평(49.58m²) 빌라 3층으로 이사했다.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45만원. 2년 뒤, 나씨는 월세 보증금 1000만원을 돌려받기 위해 두 달여를 씨름하게 된다. 집주인은 보증금 돌려줄 시기를 일방적으로 미루거나 일부를 돌려주지 않으려 했다. 법적인 수단을 동원하며 들이는 시간과 비용, 심적 부담은 모두 나씨의 몫이었다.

같은 해 6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나씨는 계약이 끝나는 9월28일 이사를 갈 것이라고 통보했다. 집주인은 인터넷 부동산 중개 사이트에 집을 내놓아달라고 부탁했다. 집을 보러 온 사람은 있었지만 들어오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9월15일, 나씨는 집주인에게 계약 만료일인 9월28일까지 보증금을 돌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집주인은 ‘10월 말까지 보증금을 돌려주겠다고 부동산 중개업소에 말해놓았다’며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젊은 아가씨가 건방 떨지 마. 계약 끝났다고 딱 돈 달라는 사람이 어디 있어?”

ⓒ시사IN 윤무영나하나씨(위)는 월세 보증금을 제때 돌려주지 않는 집주인 때문에 법적 분쟁을 치러야 했다.

황당하고 억울했다. 월세도 공과금도 밀리지 않았고, 계약 기간도 지켰다. 월세 생활자들에게 보증금 1000만원은 큰돈이다. 나씨는 “계약이 끝났으니 보증금을 되돌려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폭언을 하며 무작정 기다리라니까 혹시 돌려받지 못하는 거 아닌가 겁이 났다. 억울해서 손이 떨리고 밥이 안 넘어갈 정도였다”라고 말했다.

인터넷을 검색해 대응 방법을 찾았다. 흩어져 있는 정보를 모으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먼저 내용증명을 보내 보증금 반환을 요청했다. 집주인 대신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다. “건물주가 10월31일까지 보증금을 꼭 주겠다고 한다”라는 문자였다. 나씨는 부동산의 공증을 요청했다. 대답은 없었다. 결국 나씨는 9월30일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했다.

임차권등기명령은 세입자가 보증금의 일부나 전부를 돌려받지 못했을 때, 이사를 간 뒤에도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을 유지해주는 제도다. 또한 등기부등본에 임차권등기명령이 기록되기 때문에, 다음 세입자에게 집주인이 보증금을 제때 돌려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는 역할도 한다. 임차권등기명령이 발효된 뒤에는 연 5%의 보증금 지연 이자를 받을 수 있다. 나씨는 인지대와 송달료 등을 합쳐 임차권등기명령 신청에 2만6300원 정도를 들였다.

내용증명부터 강제집행까지 ‘생돈’이 든다

나씨가 집주인에게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했다고 통보했지만, 집주인 측은 임차권 등기 해제 서류를 줘야 보증금을 주겠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중재를 해줘야 할 부동산은 집주인의 주장만 대변하며 자신은 제3자라고 발을 뺐다. 결국 나씨는 임차보증금 반환소송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내 시간과 돈을 써가며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집주인에게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전자소송을 활용하면 의외로 혼자서도 간단히 소장을 작성할 수 있었다.

2000만원 이하의 소액 소송은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판사가 직권으로 피고에게 원고의 청구 취지대로 의무를 이행하라는 권고를 할 수 있다. 이를 이행권고결정이라고 한다. 피고(집주인)가 이행권고결정문을 송달받은 뒤 2주간 이의신청을 하지 않으면 판결이 확정된다. 이의신청이 없었기 때문에 나씨는 재판 없이 소송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소송에서 승리했다고 바로 돈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 이행권고결정문을 근거로 강제집행을 신청해야 한다. 11월5일, 나씨가 집주인에게 소송에서 승리했으니 보증금을 주지 않으면 강제집행을 하겠다고 통보했다. 집주인은 “웃기고 자빠졌네. 정신 빠진…. 어디서 강제집행을 해. 나하고 정산을 해야지 소송은 무슨 소송이야”라며 소리를 질렀다. 또한 보증금은 법원에 공탁을 해놨다고 말했다.

확인해보니 보증금 1000만원 중 875만원이 공탁되어 있었다. 이미 지급한 9월 월세와 계약 만료 뒤인 10월 월세, 시설파손 복구 금액을 더해 125만원을 뺀 금액이었다. 나씨는 “이럴까 봐 월세 이체 기록도 정리해두고, 퇴거할 때 집 사진도 꼼꼼하게 찍어두었다. 파손된 게 하나도 없다는 증거가 있는데, 간이 영수증을 첨부하며 돈을 떼어갔다”라고 말했다. 그 875만원마저 나씨가 건물을 명도해야 돈을 찾을 수 있다는 반대급부를 걸어놓은 상태였다. 나씨는 임차권 등기가 등록된 뒤 모든 짐을 빼고 집 열쇠를 공탁해두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건물 명도를 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집주인이 명도 확인을 해주지 않으면 반대급부를 해제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나씨는 강제집행을 신청했다. 11월17일, 집행관이 강제집행을 하기 위해 집을 방문한 뒤에야 집주인은 공탁금 반대급부를 해제하고 보증금 잔액과 이자를 더한 129만4739원을 마저 공탁했다. 11월19일, 나씨는 계약이 만료된 지 두 달 만에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내용증명부터 강제집행까지 인지대, 송달료, 수수료 등을 합쳐 약 12만원이 들었다.

나씨는 직장을 다니지 않고 서울의 한 공방에서 예술 작업을 한다. 그 덕에 상대적으로 서류를 준비하고 법적 절차를 밟으며 집주인과 부동산을 상대할 시간이 있었다. 그나마 계약 만료 뒤에는 친구와 함께 살기로 해서 당장 보증금이 필요한 상태도 아니었다. 나씨는 “집주인들이 돈을 안 주기는 정말 쉬운데, 세입자가 정당하게 돈을 돌려받는 절차는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윤무영집주인은 계약이 끝나면 다음 세입자와 무관하게 보증금을 반환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보증금이 소액일수록 반환율이 떨어진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한 서울의 한 주택가.

나씨처럼 대응할 수 없었던 피해자도 있다. 나씨의 집주인이 소유한 다른 건물의 세입자들 중 일부는 자신들도 보증금을 제대로 돌려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경기도 광명시의 한 오피스텔에서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주차비·관리비를 합쳐 52만5000원을 내며 살던 김희연씨(가명)는 2015년 12월20일 계약 만기에 맞춰 이사를 가려 했다. 그러나 집주인은 다음 세입자가 들어오지 않아서 보증금을 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법적으로 집주인은 계약 기간 종료 후, 다음 세입자와 무관하게 보증금을 반환해야 한다. 김씨는 승강이 끝에 보증금 500만원 중 약 410만원을 돌려받았다. 주차장을 사용하지 않았던 5개월간의 주차비, 마지막 달 수도요금·전기세를 빼고 준 것이다. 여기에 더해 집주인은 “앞으로 법적인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요구했다. 김씨는 “너무 쓰기 싫은데, 먹고살기 바빠서 더 이상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써줬다.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많이 억울하다”라고 말했다.

김씨 직전에 해당 오피스텔에 살았던 이 아무개씨(29)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계약 기간이 끝나기 전, 이사를 가겠다고 미리 통보를 했는데 집주인이 급하게 돈이 들어갈 데가 있다며 2~3개월간 보증금을 주지 않았다. 그 정도는 여유가 있어서 기다려줬더니, 시설 파손과 관리비 미납을 이유로 약 120만원을 제하고 돌려줬다. 이씨는 망가뜨린 것도 미납한 적도 없었다고 주장했으나, 2~3개월 전 일이라 증거가 없었다. 이씨는 “법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법적 절차도) 충분히 할 수 있었지만, 소송으로 가도 집주인이 안 주고 버티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냥 그 돈만 받았다”라고 말했다.

분쟁 전 조정절차를 악용하는 임대인들

서울시 전월세보증금지원센터(이하 센터)는 2012년 8월 개소 이후 2015년 10월까지 3년간 총 14만4000여 건의 임대차 분쟁 상담을 진행했다. 이 중 약 30%는 보증금 반환 문제다. 센터에서 법률 자문을 맡고 있는 정재훈 변호사는 “오히려 보증금이 소액일수록 반환율이 떨어진다. 고액의 보증금을 낼 경제력이 있는 임차인은 쉽게 변호사를 선임해 소송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기 때문에 포기하기 쉽다”라고 말했다.

센터는 분쟁 전 조정절차를 도입해 임대인과 임차인의 갈등이 소송까지 치닫지 않도록 중재하고 있다. 정 변호사는 “소송까지 가는 것은 최악의 상황이다. 임대인이 당장 보증금을 지급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면 분할 납부라도 보증하는 등, 서로 조금씩 양보해서 감정의 골을 풀고 가는 것이 좋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 분쟁 전 조정절차에는 법적인 근거가 없다. 임대인이 조정을 거부하고 ‘법대로’를 주장하면, 임차인은 소송의 부담과 보증금 포기 중 하나를 선택하는 수밖에 없다. 정 변호사는 “이런 점을 잘 알고 악용하는 임대인도 분명히 있다. 주택임대차보호법에 임차인이 조정을 신청할 경우 임대인이 거부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다면 분쟁 전 조정절차가 훨씬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신한슬 기자 다른기사 보기 hs51@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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