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사교육 탈출


학교 1년 쉬랬더니 잠만 자던데요?

10대에게도 안식년이 필요해

 

“얘들아. 목소리에 꿀 발랐어? 이 부분을 왜 이렇게 느끼하게 불러?” 음악 교사의 타박에 아이들이 킥킥댄다. 그래도 지적받은 대목을 다시 부르는 아이들의 표정은 진지하다.

서울 종로구 북촌에 자리 잡은 정독도서관 3층. 이곳에 오디세이학교가 있다. 중학교를 졸업한 아이들 40여 명이 1년간 정규 교육과정을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의 삶과 진로를 탐색하는 한국형 인생학교다.

인생학교는 흔히 ‘10대들의 안식년’이라 불린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전 1년을 쉬면서 봉사·여행·인턴 활동 등 다양한 경험을 쌓고 진로를 탐색하는 아일랜드 전환학년제(Transition Year)나 덴마크 에프테르스콜레(Efterskole) 등에서 유래했다. 영국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거나 사회에 진출하기 전 휴지기를 갖는 갭이어(Gap Year)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한국 또한 내년부터 중학교 1학년생을 대상으로 자유학기제를 전면 실시한다. 이 기간에는 중간·기말고사 등이 전면 금지되며, 학생들은 토론·참여형 수업을 통해 자신의 적성과 진로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을 돌아보고 진로를 탐색하기에 중1은 너무 이르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도 다른 나라와 달리 중1에 이런 과정을 둔 이유는? 두말할 나위 없이 대학 입시 때문이다. 입시 일정상 고교에 이런 과정을 도입했다가는 학부모·학생들의 반발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렇다 보니 중1 자유학기제라는 어정쩡한 제도가 도입된 것이다.

ⓒ시사IN 조남진오디세이학교에서는 수업 시간이나 쉬는 시간이나 교사와 학생들이 한 공간에 머물며 생활한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 한국형 인생학교다. 시작은 민간에서부터였다. 외국 사례를 보며 딸에게도 ‘쉬면서 곁을 돌아보는 시간’이 꼭 필요하겠다고 판단해 중학교 졸업 이후 1년간 딸의 고교 진학을 유예시킨 적이 있는 이수진씨는 올해 초 자신의 경험을 발판 삼아 ‘꽃다운친구들’이라는 교육단체를 발족시켰다(학교 1년 쉬랬더니 잠만 자던데요? 기사 참조).

그런가 하면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는 덴마크 에프테르스콜레를 본뜬 ‘꿈틀리 인생학교’를 개교하려 준비 중이다(〈시사IN〉 제424호 ‘우리 안의 덴마크를 발견합시다’ 기사 참조). 강화도에 세워지는 이 학교는 1년간 기숙 과정으로 운영된다. 풀무학교 교사 출신들을 상근교사로, 조국 서울대 교수·박원순 서울시장 등을 비상근교사로 초빙할 계획이다. 정승관 꿈틀리 인생학교 초대 교장(전 풀무학교 교장)은 “기숙 생활만의 강점을 살리면서,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꾸려가는 학교를 만들겠다”라고 말했다.

이우학교 부설 함께여는교육연구소와 교육시민단체 ‘아름다운배움’ 또한 2016년 개교를 목표로 ‘열일곱 인생학교’ 신입생을 모집 중이다. ‘용인학교’와 ‘일산학교’ 두 군데로 캠퍼스가 나뉘게 될 이 학교는 통학형으로 운영된다. 우경윤 함께여는교육연구소 소장은 휴학을 거듭하면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헤매는 대학생, 취직을 해서도 끊임없이 이직을 꿈꾸는 직장인들을 보며 “조금만 일찍 자신이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어도 삶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움을 느껴 인생학교를 준비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 학교는 ‘도시형 대안학교의 성공 사례’로 꼽혀온 이우학교의 노하우를 기반으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할 계획이다.

민간에서 준비 중인 이들 학교와 달리 오디세이학교는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공약에서 출발한 민관 협력형 인생학교다. 서울시교육청과 꿈틀학교·민들레·아름다운학교 등 대안교육 기관이 공동으로 운영지원센터를 구성해 학교를 운영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이미 일반고 배정을 받은 고1 학생 중 첫 신입생을 뽑아 7개월 남짓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짧은 기간이지만 맨땅에 헤딩하던 작년과 달리 올해는 눈앞에 드러난 성과를 바탕으로 좀 더 여유 있게 2016년도 신입생을 모집하는 중이다”라고 정병오 오디세이학교 교사는 말했다.

교무실과 교실의 경계가 없는 학교

졸업을 앞둔 오디세이학교 1기생들의 면면은 다양하다. “공부는 꼬박꼬박 했지만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게 뭔지 몰라 답답해 오디세이학교를 선택했다”라는 ‘범생이’가 있는가 하면, 공부는 낙제점에 축구 말고는 낙이 없던 학교 부적응아도 있다. 지난 1년간 이들은 과연 꿈을 찾았을까. “그 짧은 기간에 어떻게 꿈을 찾겠나”라고 기자에게 오히려 반문하는 김진영양(상명고)은 그럼에도 “내가 속해 있던 원 바깥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지난 1년은 충분히 값졌다”라고 말했다. 교무실과 교실의 경계가 없는 이 학교에서 교사들과 1년간 부대끼며 ‘어른에 대한 신뢰를 회복했다’는 아이들도 있다.

어찌 보면 한국의 교육 현실에서 인생학교를 선택한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모험에 가깝다. 대안교과 위주로 수업이 진행되는 인생학교 특성상 일반 고교 복학 시 일정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병곤 경기교육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미국에서 공교육 혁신 모델로 꼽히는 메트스쿨의 경우 ‘왜 청소년이 학교를 떠나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됐다. 아이들을 학교라는 틀에 가두지 말고 사회로 넘나들며 배우게 할 때 아이들의 잠재적 능력 또한 폭발한다”라고 말했다.

이 학교에 온 뒤 중독 직전까지 갔던 게임을 끊고 래퍼의 꿈을 키우게 됐다는 김효건군(오산고)은 자신이 작사·작곡한 랩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무섭다고 도망치지 마 man/ 넌 이 세상 누구보다 멋있는 girl/ (중략) 이 순간을 믿고 이 순간을 질러/ 바로 너가 이 순간의 최고니까.”

기자명 김은남 기자 다른기사 보기 ke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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