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방송문화진흥회 고영주 이사장이 화제다. 국정감사 현장과 언론 인터뷰에서 보인 자극적 발언 때문이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민중민주주의자로 변형된 공산주의자”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를 아예 ‘공산주의자’로 규정했다. 김문수 전 경기지사는 ‘전향한 공산주의자’란다. 그뿐 아니다. 사법부에도 김일성 장학생이 침투해 있다는 폭발적 발언들을 쏟아내고 있다. 더 가관인 것은 “한미연합사 해체, 국보법 폐지, 연방제 통일은 북의 대남 전술 핵심”이기 때문에 노무현 정부는 종북 좌파라는 것이다.

고영주 이사장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북한의 대남 전술에 구국의 일념으로 맞서 싸워왔다고 자평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발언을 자세히 살펴보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미명하에 그 자체를 해치는 자가당착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유민주주의는 문자 그대로 서구에서 개인의 자유를 지고의 가치로 간주하는 자유주의와 사회계약의 절차적 합의를 제도화한 민주주의가 결합해 만들어진 정치 이념이다. 여기서 각 개인이 자발적 의사에 따라 사회계약을 통해 만들어놓은 정치 공동체가 국가이다. 따라서 국가는 각 개인들의 단순한 합에 지나지 않으며 국가 자신의 독자적인 이념이나 선호성을 가질 수 없다. 바로 그런 이유로 개성의 존중과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핵심적 헌법 가치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칼 포퍼라는 철학자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저서에서 자유민주주의는 플라톤이나 마르크스가 지향했던 유토피아적 닫힌 사회가 아니라 관용과 다양성, 그리고 합리적 비판을 기반으로 하는 유연하고도 ‘열린 사회’를 지향하는 이념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열리고 성숙한 사회에서는 사회주의·공산주의 할 것 없이 모든 이념에 대한 논쟁이 허용되어야 한다. 헌법이 정한 규범과 원칙에 따라 국민이 선택하면 될 일이다. 어느 누구도 특정 사상과 이념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건 북한이라는 위협 세력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지켜나가야 할 자유민주주의의 덕목이다. 그게 자유 대한의 힘이다.

불평등한 사회를 비판하며 임금 구조의 개선을 요구하는 동시에 재벌개혁과 더 많은 복지를 요구하는 게 무엇이 문제인가? 유엔인권위가 권고하는 국가보안법 철폐를 지지했다고 종북 좌파로 낙인찍히는 사회가 무슨 자유민주주의 국가인가? 노무현 정부가 연방제를 제안한 것이 아니라 우리 정부의 공식 통일노선인 1989년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 따라 그 중간 단계로서의 남북연합을 제안한 것인데, 이를 두고 북의 대남 전술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왜곡하는 것은 더더욱 수용하기 어렵다. 한·미 동맹을 유지하되 한국군이 주력군이 되고 미군을 지원군으로 하는 전력구조 개편 차원에서 한미연합사를 해체하고 재조정하자는 주장을 어찌 이적행위라 할 수 있는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적대시하는 이분법적 흑백 논리

자칭 ‘애국적 자유민주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반대 세력을 걸핏하면 ‘변형된 공산주의자’로 매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자유민주주의로 포장한 ‘변형된 파시스트’가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파시즘은 애국이라는 이름하에 개인보다 국가를 우선시하는 국가주의의 한 형태다. 동시에 반공주의와 국수주의를 무기로 삼는다. 또한 독단적 권위주의나 전체주의가 그 통치 형태로 나타나며 평등을 부정하고 불평등을 국가 발전의 동력으로 믿는다. 더 심각한 문제는 나의 사상과 이념만이 옳고, 나의 애국만이 진정한 애국이라 믿으며,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적대시하는 이분법적 흑백 논리의 도그마에 빠진다는 점이다.

고영주 이사장은 평생 공안검사로 살아왔다. 그의 사유와 행동의 존재론적 제약을 인정한다. 그리고 분단, 6·25, 권위주의 정권과 민주화 과정의 양극단 시대를 살아오면서 형성된 그의 트라우마도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분법적 프레임에 빠져 한국 사회를 일방적으로 예단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처사다.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공산주의 불온 문서로 간주하는 그런 시각으로 21세기 한국 사회를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이제 ‘종북 좌파’나 ‘변형된 파시스트’들이 한국 사회를 재단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에릭 홉스봄이 간파했던 ‘극단의 시대’를 이제는 넘어서야 한다. 양극단을 물리치고 치유와 상생, 다양성과 관용이 넘치는 한국 사회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게 자유민주주의와 헌법을 지키는 길이다.

기자명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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