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물대포의 ‘안전하지 않은 물줄기’가 등을 가격하는 순간, 나는 응암동 할인마트 3층에 여전할 그 검정색 안마 의자의 300만원짜리 성능을 추억했다. 툭툭툭. 푹푹푹. “손님, 시연용 상품에 30분 이상 앉아계시면 곤란합니다.” “지금 없이 산다고 무시하시는 겁니까?” “예 그렇습니다.” “예 그렇군요.” 반면 물대포는 차별하지 않았다. 만인에게 축축하게 ‘쏴아’. 얼마든지 오랫동안 ‘쏴아’. 그러거나 말거나. 워쇼스키 형제라면 물대포의 습한 평등마저 실제의 차별을 유지하기 위한 가상의 형평으로 분석하고 말 것이다.

워쇼스키 형제의 영화는 늘 세계가 조작돼 있음을 전제한다. 기계가 조작하고(〈매트릭스〉), 독재정부가 조작하고(〈브이 포 벤데타〉), 거대 스폰서 기업이 조작한다(〈스피드 레이서〉). 사람들은 조작된 세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 속에 안주한다. 뭔가 잘못돼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냥 그렇게 산다. 심지어 조작된 세계임을 알고 나서도 매트릭스 안에 남아 배불리 먹고 사는 길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쪽이 편하고 익숙하니까. 레이싱 세계가 돈에 의해 병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하는 주인공에게 윽박지르는 사업가도 있다. 이 철부지 어린 것아, 그게 진짜 세상이야! 어른들의 세상이야!

두 달을 훌쩍 넘긴 지금의 광장은 더 이상 쇠고기 프레임만으로 작동되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가 상징하는 온갖 천박한 가치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시민 불복종·저항 운동으로 바라보는 게 적확하다. 워쇼스키 식으로 말하자면 광장 위의 촛불 하나하나가 ‘각성한’ 용자이다.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에게 받아든 붉은 약을 꿀꺽 삼킨 네오와 같다. 〈브이 포 벤데타〉에서 독재정권의 폭력을 몸으로 감당한 뒤 브이와 함께하는 이비와 같다. 〈스피드 레이서〉에서 레이싱 세계의 추악한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순전한 재능과 믿음으로 끝내 승리를 거머쥐는 스피드의 박력과도 같은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 광장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화자찬 떠들어 논할 건 없다. 용자에 어울리는 복장이 예비군복인지 하이힐인지 따질 이유도 없다. 다만 그에 앞선 자성이 필요하다. 이명박 정부에 속았다고 말한다. 정말 그런가. 속았어도 속은 게 아니다. 신자유주의 가치를 좇는 이명박 정부가 시민 삶을 볼모로 특정 집단의 사익을 챙기는 건 스스로의 정체성에 충실한 것일 뿐이다.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긴 뭐가 그만이야. 그보다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 공공의 환기가 필요하다. 고시 철폐와 이명박 개인에 대한 단죄가 전부가 아니다. 이 정부가 대변하는 모든 가치, 그리고 무엇보다 그 가치를 지지했던 나 자신과 싸워야 한다.

물대포와 방패로는 촛불 끌 수 없다

〈브이 포 벤데타〉에서 TV 전파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 브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책임은 물론 국가가 지고 있습니다. 반드시 그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할 작정입니다. 그러나 사태가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거기 앉아 TV를 보고 있는 여러분이죠. 바로 여러분이 방임했기 때문입니다.” 영화 말미, 사람들은 저마다 브이의 가면을 얼굴에 뒤집어쓰고 약속된 날, 약속된 광장으로 나선다. 자성을 동력으로 무기력을 깨고 행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광장에 나서 힘을 갖고 세상을 바꾸기를 열망한 것이다.

그때 그 흰 가면의 숱한 무리나 우리 광장의 촛불이나 오십보백보다. 이미지고 상징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의사당이 화염에 물들자 시민은 그제야 가면을 벗고 얼굴을 찾는다. 그리고 가면을 허공 위로 집어던진다. 촛불도 그처럼 언젠가 꺼질 것이다. 물 뿌리고 때려잡아 끌 수 있다는 ‘어른스러운’ 착각은 버리는 게 좋다. 촛불을 든 사람들의 자성과 환기, 그리고 끈질긴 의지에 의해서, 그것은 스스로 꺼질 것이다.

기자명 허지웅 (프리미어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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