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화백의 그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지난 6월10일 서울 시청 앞과 광화문을 가득 메운 촛불의 행렬은 정치적이었다기보다 미학적이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랬다. 종이컵에 담긴 작은 촛불이 함께 모여 만든 거대한 무늬가 거리를 수놓았다. 정치적인 것이 문화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건 이런 형세이다. 촛불집회는 개개인이 모여 만든 그림 같다. 나는 이 광경을 닮은 그림 한 장을 떠올렸다. 그 그림은 바로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이다.

김환기는 한국을 대표하는 추상 화가이다. 한일병합이 있은 지 3년 뒤에 그는 유배지로 유명했던 전남 신안군의 기좌도라는 섬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때 그는 서울로 유학을 떠났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1936년 니혼 대학 미술과를 졸업한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김환기는 어려서 생계 걱정을 하지 않았지만, 예술가로서 그의 삶이 녹록했던 것은 아니다. 전쟁의 참화는 예술가에게 재난 상황이었다. 사막 같은 시절을 보낸 뒤 그는 프랑스와 미국으로 건너가서 작품 활동을 하는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이런 삶의 여정을 그대로 녹여낸 대표작이다. 머나먼 이국에서 그는 고향집에서 듣던 뻐꾸기 울음소리를 생각하며 끝도 없이 캔버스에 점을 찍었다고 말했다.

이 그림의 이미지는 여러 모로 촛불집회를 닮았다. 네모 칸에 점점이 박혀 있는 작은 형상은 개별자이면서 전체를 이루는 작은 세포 같다. 그리고 이건 촛불집회라는 새로운 정치 형식의 모습이기도 하다. 어둠을 밝히는 촛불의 색채는 제각각이다. 위계도 배후도 없는 촛불집회의 특징이다. 자발적으로 모였다가 흩어지는 이들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 김광섭의 시 〈저녁에〉를 읽고 영감을 얻어 그린 이 그림에서 저 작은 점은 우리가 밝힌 촛불이고, 하늘이 밝힌 별이다.

이렇게 이 그림에서 드러나는 것은 1950년대 한국이라는 전근대의 공간을 넘어가기 위한 유토피아 충동이다. 우리가 촛불을 밝히면서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호명하듯이, 김환기는 화폭에 찍은 점으로 ‘오지 않은 근대’를 막막하게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이에게 공평한 국가에 대한 열망이자 동시에 그 속에서 함께 살아갈 개별자들의 자유에 대한 옹호이다. 모더니즘이 추구한 공평무사한 세계는 실패했지만, 그에 대한 열망은 여전히 살아남아 촛불을 타오르게 만든다. 유토피아를 향한 충동은 작은 사각형 속에 갇혀 있지만, 그 모양새는 하나로 뭉쳐 형언할 수 없는 무늬를 자아낸다. 상징의 차원을 넘어서는 어떤 실재의 경지, 그 지점에서 이전과 다른 정치적인 것이 출몰했다. 그리고 이 정치적인 것은 또다시 작은 점으로 흩어져서 언제 어디서건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라. 이처럼 촛불집회에 담긴 마음은 김환기가 붓을 들어 끝없이 서로 다른 점을 찍던 그 마음이기도 하다.

기자명 이택광 (경희대 교수·영미어학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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